“내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쁘지 내가 나쁜 것이 아니잖아요.”
1924년 갑자년에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후쿠오카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돌아와 경기도 성남에서 여생을 보낸 심미자 할머니는 생전에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 일본인(이토 다카시)은 심 할머니처럼 세상을 떠난 한국 여성 아홉 명과 북한 여성 열한 명의 증언과 사진을 담은 책 ‘기억하겠습니다-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을 2014년에 냈고, 그 책이 2017년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북한의 김대일 할머니가 떠올린 일본군의 만행은 차마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참혹하다. “일본의 패전이 명확해지자 병사들은 우리 조선인과 중국인 여자 150명 정도를 두 줄로 나란히 세웠어요. 소대장이 명령하자 여자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피가 비처럼 쏟아졌고,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피투성이가 된 채 시체 속에 묻혀 있었어요.” 또 다른 북한 위안부 피해자인 리복녀 할머니는 “병사들은 여자들의 머리를 잘라 끊는 물에 넣었고 그것을 우리에게 마시라고 강요했다. 거부하면 우리도 죽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증언했다.
2013년 서울에서 사망한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엔 울분이 서려있다. “한 여자는 장교와 심하게 싸우기도 했어요. 장교에게 차여도 몇 번이나 물고 늘어졌어요. 실신했다가 다시 정신차리면 또 반항했습니다. 이 벌거벗은 여자는 성기에 권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일본인이 자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대구 출신 문옥주 할머니는 1942년 해외 식당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저 멀리 미얀마에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랑군에서 자살한 여자의 시체를 태울 때입니다. 잘 타도록 막대기로 쑤셨는데 시체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어요. 이 때문에 귀국해서도 2년 정도는 불고기를 먹지 못했지요.”
결국 지금은 책에 소개된 남북의 위안부 피해여성 20명의 증언은 모두 유언이 되었다. 2008년 사망한 심미자 할머니는 “무엇보다 일본과 한국의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해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2004년 세상을 등진 이귀분 할머니는 “눈물만 흘리지 말고 사실을 알리는게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2003년 북한에서 사망한 김영실 할머니는 “시집도 가지 못한 이 한을 가지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자신의 아픈 상처를) 이야기하게 됐다”고 했다. 하나같이 ‘기억해 달라’는 절규들이다.
40여년간 피해 여성들을 취재해 온 이토는 이 외침을 듣고 가책을 느꼈다고 했다. 피해 할머니들의 눈에는 자신도 그저 일본인이요 남성으로 보였을 것이므로.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는 할머니들의 외침을 경청하고 있는가. 지난 2015년 일본 정부가 10억엔(약 100억원) 규모의 예산을 출연하는 조건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합의했으나, 아쉽게도 정부는 당사자 할머니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도 이끌지 못했다. 그리고 올해 초 중국에 남아있던 마지막 위안부 피해자 박차순 할머니가 별세함으로써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정녕 우리는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의 참혹한 역사를 일본의 사죄조차 못받고 잊히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그래서 한 양심적 일본인이 기록 ‘기억하겠습니다’는 일본에서의 출간보다 3년이나 늦은 이제야 한국에서 소개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의 의미가 결코 작을 수 없다.
/문성진 문화레저부장 h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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