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씨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정치는 남일”, “정치인은 인간도 아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기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면접원이 질문을 하나씩 불러주고 답하는 방식이었다. A씨는 다소 귀찮았지만, 야박하게 전화를 끊을 수 없어 끝까지 질문에 답했다.
#2. A씨는 몇 시간 뒤 또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기계음이 들렸다. 후보들을 불러주고 지지하는 후보를 찍으라는 여론조사 자동응답시스템(ARS)이다. 먹고 살기 바쁜 A씨는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3. B씨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다.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동물)다. 판세 분석 능력이 정치평론가 저리 가라 수준이다. 지지하는 후보도 명확하다. 그는 최근 ARS 여론조사 전화를 받았다. 차가운 기계음이지만 꾹 참고 끝까지 답변했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가 우후죽순으로 발표되고 있다. 현대 정치에서 여론조사는 그 자체가 ‘힘’이다. 유권자들의 마음속을 읽어내기 위한 여론조사가 반대로 유권자의 생각을 바꾼다. 대선 후보들이 여론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문제는 여론조사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기관이 다른 방식으로 하는 여론조사니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법. 단순히 결과로만 나오는 ‘숫자’보다 조사 방식의 차이와 그 결과의 인과관계를 살펴보면 정치의 속살을 좀 더 깊이있게 알 수 있다.
▲‘그때 그때 다른 여론조사’ 기관별로 ‘정반대’ 결과도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지난 7~8일 전국 성인남녀 2,244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2.1%포인트)
다자대결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2.6%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37.2%)를 5.4%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오차범위를 넘는 문재인 후보의 ‘승’이다.
이보다 하루 늦게 실시된 여론조사는 완전히 딴판이다. 코리아리서치가 8~9일 유권자 2,0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신뢰도 95%, 표본오차 ±2.2%포인트)에 따르면 5자 대결에서 안철수 후보는 36.8%로 1위를 기록, 32.7%를 얻은 문재인 후보를 오차범위 내인 4.1%포인트 차로 앞섰다.
양 후보측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양자 가상대결도 마찬가지다. 리얼미터 조사에서 문재인 후보는 47.6%로 안철수 후보(43.3%)를 앞선 반면, 코리아리서치 조사에서는 안철수 후보가 49.4%로 문재인 후보(36.2%)를 13.2%포인트라는 큰 차이로 눌렀다.
▲여론조사의 ‘로제타석’, ARS= 그래서 몇몇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고. 전문가들은 “한가지 이유만으로 답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가장 주요한 이유 하나만 꼽아달라”고 떼를 쓰자 돌아온 답은 ‘ARS’였다. A씨의 가상사례 보자. A씨는 면접조사에는 응했지만 ARS에는 불응했다. ARS에서 A씨 같은 정치 무관심자는 제외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이는 응답률 차이로 나타났다. ARS를 병행하는 리얼미터 조사의 응답률이 10%에 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병일 엠브레인 상무는 “기계음인 ARS를 들으며 끝까지 응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기대하기 어렵다”며 “ARS에 응답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에 관심이 많고, 특정 후보를 강하게 지지한다는 반증”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ARS가 포함된 리얼미터 조사에서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적극 지지층이 많다는 뜻이다. 반면, 면접조사인 코리아리서치 조사에서 안철수 후보가 우세한 것은 ‘반문’ 정서에 따른 반사적 효과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투표율이 낮으면 문재인 후보가, 그 반대면 안철수 후보가 유리하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면접조사와 ARS 어느쪽이 더 좋은 여론조사 방식일까.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ARS는 표본추출시 편향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잘 사용하지 않는다”며 “다만 비용절약 측면에서는 ARS가 유리하다”고 했다.
▲부동층의 비밀= 리얼미터 조사의 부동층은 3.9%에 불과한 반면, 코리아리서치 조사는 19.8%에 달한다. 이 역시 ARS와 면접조사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ARS에 응하는 유권자는 적극지지층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없음/모름/무응답’같은 부동층이 적은 반면, 면접조사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위 사례에서 정치 무관심자인 A씨는 ARS여론조사에 응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지만 전화면접 조사에는 어쩔 수 없이 응하되, 지지하는 후보를 묻는 질문에는 ‘없다’고 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정치평론가 뺨치는 B씨는 ARS에 지지후보를 명확히 밝힐 공산이 크다.
과거 ARS의 장점이 부각된 적도 있었다.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유권자가 기계인 ARS에는 성향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샤이보수를 잘 잡아낸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민주화된 오늘날에는 이런 장점이 거의 사라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이병일 상무는 “면접조사에서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 싫어 ‘없다’ 내지 ‘모른다’로 답하는 것은 과거 70~80년대에나 나타나던 현상”이라고 일축했다.
결과적으로 리얼미터 조사에서 부동층이 적은 것은 애초 ARS에 응답하는 유권자 자체가 이미 정치에 관심이 많은 적극지지층의 비중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샤이 보수는 아예 ARS조사에 응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부동층이 적은 것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오히려 샤이 보수는 ARS보다 전화면접에 응할 가능성이 높고 전화면접의 ‘부동층’에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과 역시 문재인 후보가 더 많은 적극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반대로 안철수 후보 지지자는 언제는 다른 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유동층’이지만, 그 만큼 확장성도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화번호부의 ‘함정’ =양자 가상대결에서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앞선 결과가 처음 나온 것은 지난 2일 실시된 디오피니언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다. 양자 가상 대결에서 안철수 후보가 43.6%로 문재인 후보(36.4%)를 7.2%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오차범위 밖에서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압도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난리가 났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조사 의뢰를 검토하겠다”고도 했다.
디오피니언 조사 방식을 보면 왜 안철수 후보가 승리했는지 알 수 있다. 유선전화면접이 40%인데, 그것도 RDD가 아닌 데이터베이스 무작위추출이다. 한마디로 전화번호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터넷 조사도 했다. 이 역시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했고, 문자발송 및 링크설문에 응답하는 ‘모바일활용웹조사’를 활용했다. 최근 많이 활용되는 무선전화 면접이 없다. 여기서 핵심은 전화번호부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전화번호부에 등재된 번호를 활용하면 상대적으로 가정주부나 어르신이 조사 대상에 포함될 확률이 높아져 보수 후보에 유리한 결과가 나온다. 안철수 후보가 50~60대,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결과와 일치하는 셈이다.
이 여론조사에서 눈여겨 볼 것은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이겼다는 수치 자체가 아니라 보수와 50대 이상 유권자에서 안철수 후보의 지지세가 그 만큼 강하다는 사실이다.
▲ARS·전화번호부 조사 지양해야=전문가들은 ARS와 전화번호부 조사는 중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ARS는 적은 비용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론을 ‘오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치된 견해다.
이병일 상무는 “여론조사 업계에서 ARS는 제대로 된 조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여론조사 기관들의 모임인 한국조사협회(KORA)도 ARS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KORA회원사 행동규범에는 “ARS를 이용한 조사가 과학적인 조사방법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고 향후 ARS조사를 수행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고 돼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ARS는 부동층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기 때문에 겉으로는 유권자들의 성향을 명확히 구분하는 듯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정치권에서 부동층이 적다는 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포지티브 선거보다는 네거티브 선거로 흐르는 부작용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부동층이 많다고 판단하면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책선거에 힘을 싣지만, 부동층이 적다고 판단하면 상대방의 지지자를 빼앗기 위한 흑색선전이 난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ARS, 전화번호부, 패널 등은 모두 표본추출 과정에서 오류의 가능성이 크다.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유무선 혼합 RDD+면접방식 여론조사가 활성화돼야 한다”며 “유권자들도 여론조사를 참고할 때 유무선 RDD방식을 더 신뢰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유무선의 황금비율’은?=유무선 RDD에도 문제는 있다. 유무선의 비율을 어떻게 할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유선비율이 높으면 ‘보수’나 ‘고연령층 선호’ 후보가, 무선 비율이 높으면 ‘진보’ ‘저연령층 선호’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 실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유무선의 비율은 여론조사기관마다 다르다. 업계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비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다만, 최근 대부분의 통화가 휴대폰으로 이뤄지고, 집전화가 없는 가정도 많은 만큼 무선 비율이 절반 이상은 돼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능현기자 nhkimch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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