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정여울의 언어정담] ‘마음을 아낌없이 다 준다’는 말

작가

나이 들며 '비밀' 하나둘씩 생겨

회전문처럼 타인에 마음 반만 열어

상처받을까 먼저 도망치기 보단

할머니의 푸근한 복주머니처럼

아낌없이 활짝 열린 자세로 살고파







네 살배기 조카와 대화를 하다가 깜짝 놀라고는 한다. 하루는 조카와 대화를 나누다가 너무 복잡한 내 생각을 아이의 언어로 잘 설명할 수 없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장난스럽게 “그건 비밀이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이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준우는 비밀 싫어하는데.” 벌써 뾰로통해진 얼굴로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모가 비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랬더니 금방 얼굴이 환해지면서 “응, 비밀은 나빠”한다. 아이는 벌써 누군가의 비밀로부터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자기만 알고, 나에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 것’이 비밀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것이다. ‘비밀’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어른들의 마음이 닫혀버린다는 것을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본능적으로 포착한 것일까. 우리는 ‘이건 비밀이야’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한데’라고 말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비밀 없는 관계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본다. 비밀이 없으려면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 한다. 그 사람이 내 비밀을 다 알아도, 괜찮다는 느낌. 그 사람에게 내 어두운 마음속 비밀을 다 털어놓아도 그는 내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비밀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고 보니 ‘마음을 준다’는 표현이 너무도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는다. 언제부턴가 사람으로 인한 상처를 예전보다 훨씬 덜 받게 됐다. 이렇게 철이 드는구나 싶었다. 걸핏하면 사람으로부터 상처 입고 마음으로 피를 뚝뚝 흘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지나치게 예민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그런데 마음이 예전보다 덜 아픈 것은 더 철들거나 단단해져서가 아니라, 이제 타인에게 마음을 덜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마음을 준다’는 것은 엄청난 표현이다. 내 마음을 남에게 주면서 이 마음으로 뭐든 해도 좋다는 일종의 신체포기각서다. 그 사람이 내 마음으로 무엇을 해도 나는 괜찮다는, 무한대로 활짝 열린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예전에는 거리낌 없이 마음을 줬다. 마음을 줘야겠다고 비장하게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에게로 갔다. 그래서 걸핏하면 상처 입었다. 이제는 마음을 절반만 준다. 항상 빠져나갈 자리를 만들어둔다. 상처받았을 때를 대비해 마음의 범퍼를 마련해두는 것이다. ‘괜찮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와 특별히 친한 것은 아니야’ ‘나에게 섭섭하게 해도 어쩔 수 없지, 우리가 대단히 각별한 사이는 아니니까.’ 이렇듯 소심한 방어기제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주다’라는 표현에 한껏 골몰해 있을 때, 문득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여울아, 회전문은 항상 닫혀 있는 거 아니?” “회전문은 항상 열려 있는 거 아닌가요?” “생각해봐. 회전문은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닫혀 있어. 활짝 열릴 때가 없잖아. 한쪽이 열릴 때도 한쪽은 늘 닫혀 있지.” 과연 그랬다. 회전문은 마음을 반만 주는 나 자신을 닮은 존재였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는 기분은 썩 좋지 않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갑갑하게 느껴진다. 잠깐이지만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유리감옥 같은 회전문. 회전문은 열역학적으로 성공적인 발명품인지 몰라도 인간의 감수성을 메마르게 한다. 나는 항상 열린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닫혀 있는 회전문에 반대되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항상 닫힌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열려 있는 ‘복주머니’다. 할머니의 복주머니는 늘 애타는 설렘과 기대감을 품게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사탕도 나오고 손주들 용돈도 나오고 달콤한 추잉검도 나왔다. 할머니는 복주머니에 인생의 해답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복주머니는 항상 닫힌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항상 열려 있는 할머니의 푸근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복주머니는 느슨한 매듭으로 닫혀 있기에 아무리 꼭 묶어도 언제든 쉽게 풀 수 있다. ‘복주머니’라는 말에는 중층적인 의미가 담긴 것 아닐까. 복을 주는 주머니, 복이 되는 주머니, ‘이 주머니를 품는 모든 이에게 복을 주리라’는 열린 마음가짐까지. 우리도 타인에게 복주머니 같은 마음을 줄 수 없을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랑에 필요한 온갖 책임은 회피하는 ‘무늬만 사랑’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수줍어서 못하더라도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복주머니 같은 마음을 아낌없이 주고 싶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