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중동 순방에서 지난 8년간 미국이 취해온 ‘균형외교’의 틀을 깨며 트럼프식 ‘분열의 신(新)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1,400년간 이어진 종파 분쟁으로 형성된 이 지역의 복잡한 역학구도에서 한발 물러나 인권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세운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들과의 연대를 노골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을 고립시키며 ‘편 가르기’에 나섰다.
22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 텔 아비브 구리온 공항에 도착해 “이란은 테러리스트와 무장조직에 대한 자금과 훈련·장비지원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 전날 사우디에서 열린 ‘이슬람 아랍-미국 정상회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란 때리기’를 거듭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목소리로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결코 허용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는 그가 사우디에서 테러와의 싸움을 “선과 악의 싸움”이라고 규정한 뒤 이란을 겨냥해 “종파 갈등과 테러의 불길을 부채질하고 파괴와 혼돈을 확산시키는 무장조직에 돈과 무기를 제공”하는 국가라고 화살을 날린 것과 동일한 접근이다.
이란에 대한 노골적 적개심을 담은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무슬림의 종파분열을 교묘하게 활용한 ‘화해의 제스처’로 분석된다. 최근까지 ‘급진 이슬람 테러리즘’이라는 단어로 무슬림 진영의 강력한 반발을 샀던 트럼프 대통령이 비호감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수니파 손을 잡고 ‘내부의 적’인 시아파 맹주인 이란 공격에 나섰다는 것이다. 수니파를 대표하는 사우디와의 대규모 무기거래 약속 역시 이란과 시아파에 대한 견제로 풀이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선지자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누구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다. 수니파는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국가와 중동 외 국가들, 시아파는 이란과 이라크·시리아 등에서 우세하다. USA투데이는 “선과 악의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사우디를 대표하는 수니파와 이란을 대표로 하는 시아파를 구분한다는 것을 뜻한다”며 우려를 표했고, 뉴욕타임스(NYT)도 “수니파 국가들에 다가가기 위해 이란이라는 비용을 치렀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뚜렷한 ‘친 수니파’ 색채는 향후 중동지역 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지난 20일 친서방·개방정책을 내걸고 연임이 확정된 하산 로하니(사진) 이란 대통령이 곤란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에 대한 포위망을 조여올수록 비무슬림 국가와의 교류를 죄악시하는 이란 보수파는 개혁을 저지할 명분을 얻기 때문이다. 자칫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처럼 미국과 이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2015년 서방국과 이란이 맺은 핵합의가 백지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의 연설 이후 이란 정부는 미국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22일 국영TV를 통해 “누가 이란을 배제하고 지역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며 트럼프 대통령에 직격탄을 날렸다. 바흐람 거세미 이란 외무부 대변인도 “미국은 이란포비아(공포증)를 이용해 이란 적대정책을 계속하고 중동국가들이 더 많은 무기를 사도록 촉구한다”며 미국의 속내는 결국 무기 판매에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이 ‘엄청난 성과’로 자축한 사우디와의 무기거래가 이 지역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입지를 위협하며 미국의 오랜 우방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교착상태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을 해결할 동력을 얻기 위해 수니파 국가 포섭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는 ‘중동의 화약고’인 이·팔 지역의 평화가 찾아오면 주변국도 안정될 수 있다는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이란에 맞서 이스라엘과 수니파 무슬림 국가들이 동맹을 맺자는 네타냐후 총리의 구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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