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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어느 합창지휘자의 ‘유언’

문성진 문화레저부장

"지휘자를 보세요" 농 섞인 당부

눈길 떼지 않아야 하모니 이뤄

제멋대로하는 정치 환영 못 받아

국민만을 바라보고 협치나서야





지난달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세계명곡 페스티벌’ 공연이 있었다. 나는 서울시민합창단 베이스파트의 일원으로 그 무대에 섰다.

그날의 감회는 컸다. 고교 시절 한때 중창과 합창에 몰두한 적이 있었고 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모자란 재주 탓에 달리 살다가 이처럼 큰 무대에 서게 됐으니 그 벅참은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지휘자 김명엽 서울시합창단장은 잊기 힘든 분이었다. 74세의 고령임에도 항상 열정이 넘쳤고 뛰어난 유머감각으로 합창연습 시간에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해줬던 그는 리허설 때 이런 농담을 던졌다. “여러분, 저의 유언입니다. 지휘자를 보세요.” 모두가 폭소를 터뜨리며 들었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다. “합창은 목청이 아니라 귀로 하는 겁니다. 주도하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른 목소리를 들으세요.”

33년 전 내가 성남시립합창단 공연에 객원으로 참여했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연을 다 마치고 나서 지휘자가 이런 말을 했다. “지휘를 하면서 자네와 눈이 마주치면 기분이 좋아져. 늘 지휘자를 보고 있는 모습이 든든했어.” 그때는 그저 노래를 잘 한다는 칭찬인 줄 알았는데 “지휘자를 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하기야 나 또한 학생 합창단을 지휘하던 때 노래를 잘하는 단원보다도 지휘자를 바라보는 단원에게 마음이 더 끌리기는 했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마음 또한 매한가지일 것이다. 국민은 저만 잘났다고 큰소리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아는 정치인이라면 모름지기 합창단원이 지휘자에게 눈길을 떼지 않듯 국민만을 바라보고 정치를 해야 한다. 제 힘과 실력만 믿고 우격다짐으로 판을 주도하려 들거나 다른 목소리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린다면 국민의 지지는커녕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치는 어떤가. 야 3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청문 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한 데 이어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까지 임명을 강행할 경우 협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저는 강 후보자에 대한 야당들의 반대가 우리 정치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대를 넘어서 대통령이 그를 임명하면 더는 협치는 없다거나 국회 보이콧과 장외투쟁까지 말하며 압박하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무엇이 국민의 뜻인가.

탄핵정국으로 6개월이 넘는 국정 공백 끝에 출범한 새 정부가 한 달이 지나도록 17개 부처 장관 중 여야 합의로 인사청문 보고서를 채택해 임명된 이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유일하다. 국민이 바라는 상황이 아님은 분명하다. 일자리 창출과 경제성장 동력의 회복, 사회 양극화 문제와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해소,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대화의 복원 등 산적한 국정과제들은 대체 언제 누구더러 풀어가라는 말인가. 더욱이 협치는 국민의 명령이다. 흥정의 대상일 수 없다. 문 대통령이 취임 첫날 국회의장과 야당 지도부를 찾아가 협치를 당부하는 모습에 흐뭇해했던 국민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청와대는 80%를 웃도는 문 대통령의 지지율을 과신하지 않기 바란다. 일순간 변할 수 있는 것이 여론이요, 숱한 전례를 봐왔다. 공자의 가르침이 적힌 ‘예기(禮記)’의 다음 구절을 곱씹기를 권한다. “오만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되고, 욕망을 함부로 추구해서도 안 되고, 뜻을 가득 채워서도 안 된다.” 내가 가진 목청이 아무리 좋더라도 지휘자를 보지 않고 마구 소리를 내질러서는 합창이 아름다울 수 없다. 정치 또한 겸손과 경청이 필요하다. 오직 국민만을 바라봐야 한다. /문성진 문화레저부장 h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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