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거주하는 결혼 5년 차 한연주(37·가명)씨는 남편으로부터 몇 개월간 폭력에 시달리다 최근 경찰에 신고했다. 얼굴에 멍이 든 한씨를 본 경찰은 즉시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인 ‘쉼터’로 안내했다. 간단히 짐을 챙겨 세 살 아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한 쉼터에 들어간 한씨는 입소 첫날 아들과 함께 펑펑 울었다.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자괴감이 밀려들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때린 남편은 집에서 편하게 자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한씨는 “집은 법적으로 부부의 공동공간인데 나를 때린 남편은 집에 있고 나와 아들은 집을 나와 불편한 쉼터 생활을 하는 현실이 너무 서러웠다”고 토로했다.
최근 가정폭력 피해자의 보호시설이 노출돼 가해자가 보호시설을 찾아와 소란을 피운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가해자를 엄격히 격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6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쉼터 67곳이 운영되고 있다. 가정폭력 신고를 받은 경찰은 격리조치가 필요할 경우 피해자를 쉼터로 안내한다.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여성긴급전화 ‘1366센터’에서도 가정폭력 상담이 들어오면 쉼터 입소를 권유한다.
문제는 쉼터로 안내된 피해자는 자신의 살림을 놓아둔 채 옷가지만 몇 개 챙겨 집을 떠나 생활해야 해 불편이 크다는 점이다. 특히 직장이 있는 피해자는 쉼터와 직장 간 출퇴근 거리가 멀어지는 문제도 생긴다. 자녀와 함께 쉼터에 들어갈 경우 자녀의 통학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2년 전 이혼하고 혼자 유치원생 아들을 키우는 오현정(39·가명)씨는 “여성긴급전화의 권유로 아들과 함께 쉼터에 3주 정도 있었는데 피해자인 내가 집을 나가야 한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며 “가정폭력 가해자를 집에서 나가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해자를 격리시키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법기관이 가해자에 대해 퇴거명령·접근금지명령 등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보호명령을 청구해야 하고 그 기간이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는 2~3개월 걸려 당장 격리가 필요한 가정폭력 당사자들에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반면 독일·호주 등 외국에서는 ‘가정폭력 발생 시 가해자만 집에서 나가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격리조치가 취해진다. 경찰과 관련 기관이 법원을 통하지 않고 가해자에 대한 퇴거 및 접근금지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가정폭력 발생 시 피해자를 집에서 나오게 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분명 문제가 있다”며 “외국처럼 경찰 또는 여가부의 가정폭력 상담원이 직권으로 가해자를 퇴거시킬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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