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해가 바뀌는 것은 자연적 시간의 숫자적 단락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지난해는 ‘역사적 시간’이었고 새해도 그러할 것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광장의 뜨거운 열망이 현 정부를 탄생시켰고 그 열망을 받들어 정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아낌없이 열정을 쏟아부을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적 시간은 시간적으로는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진보를 향한 변화,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일신우일신의 과정이다. 따라서 올해는 지난해의 변화에 머무르지 않고 또다시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또다시 크게 변화하자는 말이다.
지난해의 ‘일신’은 다분히 파격적이고 가시적이었다. 정부만이 아니라 거리에 넘쳐나다시피 한 열정이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해의 ‘우일신’은 어떤 것이라야 할까. 딱히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 화두를 가지고 이제 은퇴한 필자에게는 달리 연휴라고 할 수 없는 때 모처럼 시간을 내 요즘 장안에 회자되고 있는 동시대를 다룬 영화들을 보며 새삼 터득한 것은 한마디로 ‘열정’이었다. 요사이 말로 적폐에 대한 풍자와 조롱의 열정, 이와 직결된 정의를 향한 저항의 열정, 그리고는 이와는 차원이 다른 소위 ‘열정페이’가 연상됐다. 이 열정들이 오늘을 만들었다면 내일을 위한 우일신은 이 열정들을 추스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나름의 답도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이 가운데 서로 연관된 앞의 두 열정은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우리 전통에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다. 풍자와 조롱은 매우 직설적이며 전면적인 부정으로 직결돼 저항의 자양분이 된다.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고 자타(自他)가 철저히 분리돼 자신이나 자기편은 선이라는 구도 위에 서 있다. 그러기에 타인이나 세상을 경멸하는 반면 자신이나 자기편은 미화한다. 여기에는 미국의 저명한 유머 작가 제임스 서버가 말한 ‘자신을 놀림감으로 삼는’ 유머가 끼어들 여지가 없고 상대에 대한 분노와 징벌만이 존재한다.
저항의 열정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정주의 현대사가 브루스 커밍스도 적시할 정도로 우리의 역사 전통에 녹아 있는데 이는 외세에 대한 독립만이 아니라 부정부패에 대한 정의의 열망과 맞닿아 있다. 악조건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전개된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일천함에도 집권세력의 횡포나 농단에 분연히 맞서 민주화를 진전시켜온 사실(史實)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독립은 됐지만 나라는 분단됐고 민주화 후에도 진영 대립에 열을 올려 막상 정의는 그 상(像)부터가 각기 입맛대로다.
한때 국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린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100만부 이상 팔리는 진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다 읽은 사람은 소수일 것이라고들 한다. 그의 내한 강연에 인파는 몰렸지만 그에게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한 답을 애초부터 구할 수 없었음은 그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정의에 대한 열정 자체는 귀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의를 구현할 수 없다.
이제는 열정을 추스를 때다. 무엇보다 차분한 경청으로 지혜를 쌓으면서 작은 것들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더 늦기 전에 자기편만이 아니라 구조적 전문성을 갖춘 인사로 진용을 개편하고 현장의 ‘완장’을 철수시켜야 한다. 이미 부메랑으로 돌아온 실험적 정책은 과감히 수정하고 열정페이는 당연히 없애야 한다. 적폐로 이어지기 마련인 자화자찬과 자기편 정당화의 열정은 거둬들이는 것도 또다시 새로워져야 할 새해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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