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전쟁의 중심에 있는 미국·중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수출 의존도가 각각 12.0%(2017년 기준)와 24.8%로 압도적인 터라 대외 수출 여건의 급변 상황이 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는 분석이다. 재계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기업들을 적폐로 몰아갈 게 아니라 글로벌 무역전쟁에서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큰 틀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보호무역 확산…구본준 “실적 영향 불가피”=구본준 ㈜LG 부회장은 6일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임원 세미나에서 “연초부터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대내외 사업 여건이 크게 악화되고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면서 “계열사들의 1·4분기 실적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LG 계열사들의 사업을 총괄 지휘하는 구 부회장이 최고경영진에 시기를 특정하며 계열사의 실적 악화를 예고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LG는 매 분기 임원 세미나를 개최해왔지만 실적 관련 언급을 안 해왔다.
구 부회장의 걱정은 괜한 게 아니다.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한 LG그룹은 곳곳에서 통상 분쟁 강화와 자국 산업 보호 강화에 노출돼 있다. LG전자는 한국산 세탁기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에 대응해 미국 테네시주 가전공장 건설에 나섰지만 하반기에나 라인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미 20% 관세(120만대 초과 물량에는 50% 관세) 부과가 현실화한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 악화가 당분간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산 TV에 대한 상호호혜세 부과 가능성까지 언급해 위기감이 상당하다.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LG디스플레이 역시 중국의 대형 액정표시장치(LCD) 양산 돌입에 따른 공급 증가로 가격이 떨어지는 상황을 온전히 감내해야 한다. 증권가에서는 이 때문에 LG디스플레이가 지난 5년여간의 분기 영업이익 흑자 행진을 접고 올 1·4분기에 적자 전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곳곳이 지뢰밭…안심 못하는 차(車)·반도체=미국의 통상 공세가 집중되고 있는 철강은 더 암울하다. 우리나라의 대미 철강 수출은 지난 2014년 57억5,000만달러(591만톤)에서 지난해 36억9,000만달러(372만톤)로 35% 가까이 급감했다. 개별 철강재를 집어내 고율의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하던 미국은 급기야 모든 철강재를 융단 폭격할 수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까지 꺼냈다. 한국산 철강재에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232조가 시행되면 사실상 대미 수출은 당분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국내 철강사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철강사도 철강사지만 장비와 원재료를 공급하는 협력사들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며 난감해했다.
수출 효자 품목인 반도체와 자동차도 안심할 수 없다. ‘반도체 굴기’에 나선 중국 정부는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 가격 담합 여부를 들여다보며 압박 수위를 저울질하고 있다. 미국도 특허 침해를 빌미로 수입 제한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이 거론된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김기남 사장이 연초 “올해 세계 경제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걱정했는데 이런 예상이 실제로 하나씩 현실화되는 모습이다. 자동차 산업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미 FTA 재협상으로 관세율이 조정될 경우 자동차 및 부품 산업은 향후 5년간 101억달러의 수출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석유화학업계도 보호무역 장벽에 번번이 부딪히며 속앓이 중이다. 미국 정부는 최근 태양광 셀과 모듈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최고 30%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합성단섬유와 저융점 폴리에스터(LMF) 역시 미국 내 대만 제조업체 제소로 현재 반덤핑 예비판정을 받았으며 PET 레진도 미국 기업에 피해를 줬다는 예비판정이 내려진 상황이다. 중국 제조업체들이 국내 화학 기업들의 제품을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피해 정도가 심하지는 않지만 중국 역시 일부 국내 제품에 대한 제제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태양광 폴리실리콘 덤핑 여부를 다시 심사해 2014년 최종판정 당시 관세보다 더 강화된 세율을 적용했다.
/한재영·박성호·김우보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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