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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트럼프는 닉슨이 아니다

신경립 국제부장

46년 전 역사적 회동 이끈 닉슨

그 뒤엔 '키신저의 외교술' 활약

트럼프, 닉슨처럼 성공할지 의문

안이한 낙관 말고 리스크 대비를





미국에서 역대 최악의 대통령 순위를 매길 때 거의 어김없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름이 있다. ‘교활한 딕(Tricky Dick)’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흑백 갈등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지난 1960년대 말, 분노와 분열이 팽배한 미국사회에서 대중의 불안 심리를 등에 업고 백악관에 입성한 닉슨의 재임 기간은 기존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충격과 변화·혼돈의 시간이었다.

취임 첫해부터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각국이 지키라’는 신(新)고립주의, 일명 ‘닉슨 독트린’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들을 발칵 뒤집어놓은 그는 1971년 미 경상수지 악화를 막겠다며 수입품에 대한 10% 관세 부과와 금태환제 폐지라는 폭탄을 세계경제에 투하했다. 전후 자본주의 질서를 떠받쳐온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를 초래한 이른바 ‘닉슨 쇼크’다. 국제사회에 파란을 일으킨 닉슨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민주당 선거사무실의 불법 도청을 시도한 희대의 정치 스캔들로 미 역사상 최초의 중도퇴임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약 반세기 후 미국을 이끄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닉슨 닮은꼴’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도 닉슨에게 영감을 받았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공연한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가 그렇고 대통령 당선과 동시에 불거진 러시아와의 유착 의혹인 ‘러시아 게이트’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연상시킨다.

최근 트럼프와 닉슨의 평행이론은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 8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와 10%의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수십년간 자유무역질서를 지탱해온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만남 제의를 수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예고는 많은 이들에게 1972년 닉슨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의 역사적 회동을 떠올리게 했다. 1971년 7월 TV 생방송으로 방중 계획을 기습 발표한 닉슨은 그로부터 7개월 뒤 베이징에서 환하게 웃으며 마오 주석과 악수를 나눴다. 냉전 시대가 종식을 향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역대 미 대통령 가운데 가장 큰 외교적 업적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닉슨의 영광의 순간을 재현하겠다는 자신감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은 트럼프가 닉슨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를 그 자신보다도 강하게 바라고 있다. 그가 북미대화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만 있다면. 아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아주 작은 물꼬라도 틀 수 있다면.

하지만 불안도 크다. 닉슨의 성공 뒤에는 정상회담 성사에 앞서 저우언라이 총리 등과 20여 차례나 회동한 ‘외교 귀재’ 헨리 키신저의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 두 정상이 발표한 상하이공동성명은 닉슨 방중에 앞서 키신저와 저우의 손에서 이미 95%가량 완성돼 있었다. 즉흥에 가깝게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결정한 트럼프 대통령과 미 정부가 얼마나 철저하게 북미대화를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대북라인 공백에 더해 갑작스레 국무장관까지 갈아치운 트럼프 대통령에게 키신저라는 걸출한 외교 참모를 두고 준비를 거듭한 닉슨과 같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북미대화에 한반도 안보의 앞날을 담보 잡힌 한국 입장에서는 과도한 기대와 안이한 낙관은 금물이다. 숨 가쁘게 이어질 남북·한미·북미 정상회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변수와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트럼프가 닉슨이 아니듯이 김정은은 마오쩌둥이 아니고 2018년의 북한은 1972년의 중국이 아니다.

닉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악관 집무실 벽에 후임들을 위한 10가지 규칙을 새긴다면 첫째는 ‘항상 협상할 준비를 하라. 하지만 준비 없이는 결코 협상에 임하지 말라’는 것이다.” 역사적 협상을 앞둔 백악관과 청와대가 함께 귀 기울여야 할 말이다.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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