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추앙받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젊은 시절 오만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공들여 쌓은 학문적 업적을 조롱하기 위해 툭하면 모욕적 언사를 동원했다. 자신이 물 바깥에서 경험한 선진 문물에 대한 지식을 잘난 체하며 늘어놓다가 주위의 빈축을 사는 일도 많았다. 인간적인 결함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도 김정희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중국의 것을 답습하거나 조금 변형하는 수준에만 머물렀다.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결코 완벽하지 않았던 김정희의 인생은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김정희가 오늘날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했던 조선 최고의 천재로 평가받는 것은 생의 말년에 인격적 수양과 학문·예술 세계의 심화를 동시에 이뤄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잘 알려진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쓴 ‘추사 김정희’는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순으로 기록한 전기다. 조선 시대 서화 연구자로서 오랜 시간 추사를 연구해 온 저자는 이미 2002년 김정희의 삶과 업적을 망라한 ‘완당평전’을 출간했다. 당시 이 책은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주목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저서의 오류에 대한 혹독한 비판도 있었다. 이후 추사와 관련한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지면서 유홍준은 2006년 ‘완당평전’을 절판시켰다. 저자가 12년 만에 다시 내놓은 ‘추사 김정희’는 논란을 낳았던 오류는 수정하고 새롭게 발견된 작품이나 내용은 대폭 보강했다.
한편의 문학 작품처럼 드라마틱하게 흘러가는 이 저서는 ‘균형 잡힌 서술’을 최고의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유홍준은 인물의 잘난 점과 위대한 면모만 부각하느라 전기를 ‘위인전’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마치 섬세한 기술력을 갖춘 장인이 제작한 수평 저울처럼 한쪽에 추사의 못난 결함을 차곡차곡 올리면서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특히 추사가 조선 서예계를 지배하고 있던 원교 이광사를 호되게 비판한 일화가 흥미롭다. 김정희는 서예의 역사와 이론을 담은 원교의 책 ‘원교필결’을 읽고 “요사이 서예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니 ‘촉체’니 하는 것은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아 가소롭다”며 글자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으로 깎아내렸다.
청나라의 문화에 흠뻑 빠져 있던 김정희는 20대 중반에 관직에 있던 아버지를 따라 두 달 동안 연경(燕京·오늘날의 베이징)에 머무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김정희는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도 당시의 감회에 젖어 주위 사람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여기며 면박을 주곤 했다. 이렇게 능력은 출중했지만 결함도 많은 인간이었던 추사는 55세인 1840년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면서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모한다. 8년3개월의 긴 세월 동안 김정희는 가시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처절한 외로움을 맛본다. 제주도 망망대해 앞에서 회한에 사로잡혀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읽고 쓰고 또 읽고 썼다. 젊은 시절 화려하지만 기름기가 넘쳤던 글씨체는 이 시기를 거치며 담백하고 강골 같은 힘을 품은 형태로 바뀌었다. 흉내 내기에 그쳤던 청나라 고증학의 진정한 대가로 올라섰으며 생애 최고의 명작으로 남은 ‘세한도’ 역시 제주 유배 시절 탄생했다. 유홍준은 “1840년에서 1849년에 이르는 유배기간 추사는 진정한 ‘학예(學藝) 일치’를 이뤘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약 570쪽에 걸쳐 추사의 일대기를 훑은 뒤 이 사람의 위대한 능력과 업적은 모두 천재성이 아닌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결론짓는다. “한류 열풍이 부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추사는 이미 200년 전에 세계를 무대로 학문과 예술을 전개했다. 다만 그는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의 타고난 천재성을 곧잘 칭송하나 추사 자신은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나는 칠십 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2만8,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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