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은행에 가지 않고도 대부분의 금융 업무를 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인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이런 시대가 오면 기존 은행제도의 정점에 있는 중앙은행은 어떻게 될까. 한국은행의 수장 이주열 총재는 26일 서경 금융전략포럼에 참석해 이런 물음에 직접 답했다.
이 총재는 “최근 금융산업의 빠른 기술 발전이 한국은행에도 많은 과제를 안겨준다”며 고민을 솔직히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금융과 정보기술(IT)의 융합, 핀테크 혁신은 피할 수 없는 미래라고 강조했다. 결국 금융기관도, 중앙은행도 선제적인 대비가 중요하며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은행(new bank)’이 될 수도, ‘추락한 은행(relegated bank)’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총재가 금융혁신 관련 중앙은행의 세 가지 과제 중 하나로 꼽은 것은 암호화폐다. 최근 암호화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매력적인 투자처를 넘어 기존 지급결제 수단의 대안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암호화폐가 전통적인 화폐를 대체하면 중앙은행의 역할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발행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이 총재는 “가까운 시일 안에 암호화폐가 법정통화와 경쟁하거나 대체할 가능성은 낮다”고 선을 그었다. 기술적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변동성과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고 해킹 위험도 있으며 채굴 비용도 비싸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그러면서도 “기술적 한계는 기술 발전 속도에 따라 극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며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은은 최근 암호화폐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중앙은행의 디지털 화폐 발행 시 법률적 쟁점’ 등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기준금리 조정 등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떨어지는 점도 고민거리다. 이 총재는 “핀테크가 더 발전하면 은행의 제도·역할이 축소되는 상황에 처한다”며 “은행들을 대상으로 한 통화정책도 유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이어 “핀테크 기업까지 규제 대상으로 포함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한은으로서는 대단한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마지막 과제로 금융 리스크 확대를 꼽았다. 자동화 기술 등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고위험 투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핀테크의 일종인 P2P금융(개인 간 직접 금융거래)의 경우 연체율이 급증하고 있으며 수천만달러 규모 부실 대출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은행들이 핀테크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수익성이 악화돼 건전성이 떨어질 우려도 있다.
이 총재는 이런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핀테크 혁신이 금융의 미래인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변화를 원하고 있고 혁신에 따라 편익이 증대되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케냐의 모바일 금융서비스 엠페사(M-Pesa)가 좋은 사례다. 이 총재는 “케냐는 휴대폰 보급률은 80%인데 계좌 이용률은 20%밖에 안 됐다”며 “한 통신사가 휴대폰을 계좌번호 삼아 입출금과 송금이 이뤄지는 서비스를 출시했는데 지금은 케냐 사람 70%가 이용한다고 한다”고 전했다. 부자들이나 이용할 수 있던 개인 재무관리사의 영역을 인공지능(AI) 기반 ‘로보어드바이저’가 깨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결국 변화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 총재의 결론이다. 이 총재는 “개방적인 자세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변화된 환경에서 정책의 효율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균형 있는 접근도 강조했다. 위험요소는 통제하되 동시에 기술혁신 촉진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스크 관리와 관련해서는 “규제감독의 대상을 금융기관이 아니라 ‘금융활동’으로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혁신기술에 대한 감독당국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짚었다. 이어 “핀테크 혁신은 국경과 업종을 초월해 일어나고 있는 만큼 정부와 금융 업계, 핀테크 업계와 긴밀하게 협업하고 국제적인 공조를 강화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연설 마지막에 최근 미국 구글 본사를 방문했던 일을 소개했다. “구글에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1시간 남짓 둘러보니 의문만 더 쌓였습니다. 다만 금융이 앞으로 우리가 정말 예상 못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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