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10% 이상 늘려 470조원대 ‘초슈퍼예산’을 편성하라는 여당의 요구가 현실화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17일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및 저소득층 지원대책’ 협의를 통해 제시한 기초연금 확대 등 몇몇 정책에 필요한 추가 예산만 최소 4조원을 웃돌고 올해 최저임금 지원대책으로 급조한 일자리안정자금(3조원)을 다시 편성한다면 당정회의 1회분 청구서만 7조원에 달한다.
여기에 ‘수조원’이라고 표현한 기금 변경 등 재정보강, 발표 예정인 자영업자 지원방안까지 고려하면 순식간에 십수조원도 훌쩍 뛰어넘을 태세다. 지난 1년 소득주도 성장에 집중한 결과 경기는 살아나지 않은 반면 양극화 심화와 고용난으로 나랏돈 쓸 일만 많아진 셈인데 재정건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당정이 가장 먼저 내놓은 대책은 근로장려세제(EITC)로 ‘지급 대상 및 지원액을 대폭 확대한다’고 설명했다. 지급 대상을 어떻게 완화하고 지원액은 얼마나 늘릴지 구체적인 방침은 나오지 않았는데 2017년 기준 157만가구에 1조1,416억원을 지급한 것을 내년에는 대상과 지급액을 각각 2배씩 늘려 300만가구에 4조원가량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1년에 한 번씩 지급하던 방식은 지급액 확대와 발맞춰 반기에 1번씩 연간 2회 지급하는 방법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만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에 지급하는 기초연금은 계획대로 오는 9월부터 25만원으로 인상한 뒤 소득 1분위(하위 20%) 어르신은 내년부터 30만원으로 한 차례 더 올린다. 30만원 인상 시점은 2021년이었지만 이를 2년 앞당겼다. 올해 기초연금 예산은 9조1,229억원인데 내년에 1분위에 5만원을 더 줄 경우 서울경제신문 분석 결과 추가로 6,000억원 이상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됐다.
아울러 고용·산업 위기지역 어르신에게 일자리 3,000개를 추가로 지원하고 내년에는 어르신 일자리를 8만개 이상 확대해 총 60만개까지 늘릴 방침인데 1,000억원 가까이 예산이 더 투입돼야 한다.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청년에게 현재 월 30만원 한도로 3개월간 지급하던 구직활동 지원금은 월 50만원 한도로 6개월까지 확대하면서 관련 예산이 4,000억원 정도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계급여 부양의무자의 기준을 고쳐 수급 대상이 7만명 증가하고 한부모 가정의 아동양육비 지원 대상은 18세 미만 월 17만원으로 확대되면서 각각 2,000억원, 600억원가량이 더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원 방향의 윤곽이 뚜렷한 사업들의 추가 소요예산만 보수적으로 추정했을 때 4조3,500억원에 이르는 셈이다. 당정은 이와 별도로 기금 변경, 공기업 투자 등으로 수조원 규모의 재정을 보강하고 올해 3조원을 편성했던 일자리안정자금의 내년 운영방안을 최저임금 대책과 함께 추가로 내놓을 계획인데 이날 당정회의에 나온 대책들로만 최소 7조원 이상, 많게는 십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된다.
정부는 지난해 8월 ‘2017~2021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통해 내년 예산을 올해보다 5.7% 늘린 453조3,000억원으로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들어서는 정부가 확장적 재정정책을 강조하며 예산을 보다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올해 예산 증가율(7.1%)을 웃도는 460조원대 슈퍼예산 편성설이 돌았고 이달 초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기획재정부와 호흡을 맞춰가고 있으며 내년에 최대한 두 자릿수 이상의 재정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예산 전망치가 470조원대까지 뛰어올랐다. 지난해 추가 세수만 23조1,000억원에 이르고 올해 역시 세수 풍년이 이어지는 만큼 구조적으로 ‘초슈퍼예산’ 편성이 가능한 상황에서 이날 당정협의 결과를 보면 여당의 요구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제는 내후년 이후다. 지금 당장은 반도체가 주도하는 수출 호조에 힘입어 세수여건이 넉넉하지만 고용 쇼크와 내수 부진 등으로 우리 경제의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데다 미국과 중국 간 통상갈등까지 번지고 있다. 복지는 한 번 늘리면 다시 줄이기 어려운데 과도하게 예산을 편성한 뒤 세수가 줄면 재정건전성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김현욱 KDI 경제전망실장은 “앞으로 산업 구조조정이나 경기 둔화에 따라 재정이 더 필요할 수 있다”며 “초과 세수는 국채 상환에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정 소요는 갈수록 늘어가는데 지출구조 혁신은 상대적으로 더딘 모습이다. 정부는 지출구조개혁단을 만들어 개선이 필요한데도 관행 때문에 없애거나 축소하지 못하는 사업을 찾고 있다. 올해 안에 과제를 확정해 세부 추진방안을 마련할 계획인데 정부 예산사업들도 일종의 기득권처럼 수혜받는 계층이 특정돼 묘수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군인연금만 보더라도 공무원연금이 2015년 개혁을 단행한 것과 달리 2013년 이후 제도 변화가 없는 상태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6년 정부가 국가재정으로 군인연금에 보전한 금액만 1조3,665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군인연금 개혁 시 최근 이뤄지는 국방개혁 등과 겹쳐 군인들의 반발이 심해질 수 있는 터라 쉽게 칼을 들이대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울러 노인 기준을 현재 65세에서 70세로 올리는 등 기존 수혜층이 있는 사업의 지출구조 혁신도 난항을 겪고 있다. /세종=임진혁·빈난새기자 liberal@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