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알아차린 술책은 더 이상 술책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북핵 문제를 이런 자세로 풀었어야 했다. 북한의 과거 협상전술을 미리 파악하고 행보를 예상하며 적절히 대응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북핵 폐기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협상술을 알고 당당히 역이용해야 한다.
북한은 늘 가격을 낮게 부른다. 과거 남북관계와 미북관계에서도 그랬다. 이번에도 쓸모없는 핵실험장 폐기를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대치한 것으로 주장하고 별 필요도 없는 미사일 엔진시험장 폐기를 종전선언과 맞바꾸려 한다. 그들은 값을 후려쳐야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값을 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북한을 제외한 다른 국가 모두와 연대해 비핵화 로드맵을 작성하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북한은 늘 제한된 권한을 이야기한다. 북한 협상가들은 상황이 불리할 때마다 늘 평양에 있는 그들의 ‘최고존엄’ 핑계를 댄다. 이 점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또 쓸데없는 일을 했다. 자기가 협상을 해보고 아니면 새 출발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자기가 풀지 못한 일을 실무회담으로 미뤘다. 결국 실무회담은 북한 실무자들의 ‘권한 없음’만 확인하고 끝날 것이다. 고위급회담이나 정상회담을 조속히 재개할 필요성을 미 측에 알리고 앞으로도 북한이 억지 주장을 펴면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함을 설득해야 한다.
북한은 늘 감정을 폭발시킨다. 유리한 협상을 위해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다. 과거 남북회담 중에 나온 ‘불바다’ 발언이 대표적인 사례다. 북미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불거진 최선희와 김계관의 담화나 이달 초 폼페이오 장관 방북 직후 나온 외무성 대변인 담화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북한의 변칙행동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당히 맞받아쳐야 한다. 2015년 목함지뢰 사건처럼 우리가 할 말을 해도 이해가 맞으면 합의가 따른다.
북한은 늘 양보를 약함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북한을 배려하고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들은 이를 약점으로 본다. 우리의 배려가 거듭돼 그들의 권리가 돼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우리의 국익에 충실해야 한다. 협력을 확대하되 보다 강도 높은 비핵화를 함께 요구해야 한다. 서먹해지는 것이 두려워 할 말을 못하면 그 말은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된다. 남북관계에서 대한민국을 을(乙)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북한은 늘 시간을 끈다. 의제를 잘게 나눠 길게 논의하려 하고 회의에서도 합의 없이 또 다른 회의로 미룬다. 이러한 살라미 협상 전술은 선거 없이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북한만이 구사할 수 있다. 반면 한국 행정부는 5년 단임, 미국 행정부는 4년 중임이므로 항상 시간표에 쫓긴다. 북한의 이러한 협상방식에 끌려가면 임기 중 어떠한 성과도 거둘 수 없다. 시간표 없는 협상은 실패의 징후다. 따라서 조속한 시기에 북핵 폐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간표를 다시 구상하고 미국과 공조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시간표가 없다”는 발언 이후 북핵 협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그에 따라 그간 묻어뒀던 문제들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북한의 협상전술까지 고려한 포괄적 전략이 없었다. 아니라면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의 전략적 결단 운운하며 헛바람만 들게 해서는 안 됐다. 북핵 정책이 너무 경직된 것은 아닌지 점검이 필요하다. 북한의 변화가 눈에 보이는데도 정부는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만 내놓고 있다. 대화에 중점을 둔 나머지 안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독자적인 군사력 건설과 튼튼한 한미동맹 유지라는 한국 안보의 두 기둥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어떠니, 미국이 어떠니 말은 많지만 결국 공은 우리에게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