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시절 유통에 푹
병참장교로 근무하며 물자보급에 흥미
빅3 대신 현대 입사…“같이 성장하겠다”
현대百 기안 작업 전담하며 내공 다져
◇ 군 병참 장교 시절 유통에 매력 … 현대百 첫발
그가 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군복무시절부터다. 학군사관(ROTC) 출신인 양 대표는 강원도 화천 27사단에서 병참 장교로 처음 유통을 접했다. 지금으로는 상상이 안 되지만 1980년대 초는 당시 최신이던 삼보 트라이젬 컴퓨터가 군에 보급되고, 군수지원물자를 발주하는 선진 시스템이 자리 잡던 때다. 그는 초임 장교 시절부터 병참 업무에 빠졌고 중위 때에는 병참학교 교관으로 선발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양 대표는 “한미 연합훈련인 팀스피릿 훈련을 치르며 단위부대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군수물자 보급이 적재적소에 이뤄지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며 “유통시장에서도 고객의 마음을 읽고 적당한 때에 사고 싶어 할 만한 상품을 공급해 좋은 가격에 파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제대한 후 입사한 곳이 현대그룹이다. 1984년 입사 당시 현대그룹은 재계 1위 기업그룹이었지만 사실 변변한 유통사업이 없던 시절이었다. 현재 현대백화점의 모태인 금강개발산업이 생긴 즈음이고 제대로 공채 직원을 뽑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유통산업에서 일하고 싶었다면 당시 유통 ‘빅3’로 각축을 벌이던 롯데·신세계·미도파 등에 들어가는 것이 정석. 더구나 대졸에 ROTC 출신이면 대기업 취직이 어렵지 않던 때였다. 그는 현대를 비롯해 두산그룹과 은행·증권사 등 여러 곳에서 합격 통보를 받은 시점이었다. 양 대표는 “육군 병참 장교로 근무하며 유통산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며 “기왕이면 이미 자리가 잡힌 선두 유통기업보다는 재계 1위지만 갓 유통사업을 시작하는 현대에서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방수로 긴급 투입
오픈 1년 400억 적자에 상인회는 불신
리빙·문화관 늘리고 ‘키덜트’로 차별화
손님 발길 이어지며 8년만에 흑자전환
◇오픈 1년 적자 400억, 아이파크몰 ‘소방수’ 투입
양 대표가 HDC아이파크몰에 영업본부장으로 오게 된 것은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했다. 당초 현대산업개발이 용산 민자역사 개발사업자로 결정되면서 그룹 차원에서 현대백화점이 입점하는 기획을 그가 제출했다. 그는 당시 전략기획실에 근무하고 있었고, 경북 울산점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점, 신촌점 등을 잇달아 출점하며 현대백화점이 빠르게 성장하던 때에 기안 작업을 사실상 전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그룹이 분할되고 현대산업개발과 임대조건 등에서 삐걱대면서 입점 자체가 무산돼 없던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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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현대산업개발은 직접 쇼핑몰을 지어 민자역사 유통 부문의 임대분양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실제 오픈 시점이 되니 멀티플렉스 CGV와 이마트 정도만 입점하면서 사달이 났다. 분양률은 95%인데 전체 매장 중 오픈한 곳이 30%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당시 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은 총 31조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으로 각광 받았지만 불경기와 용산참사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며 기약 없이 지연됐다.
양 대표는 “유통사업을 전제로 지어진 민자역사가 아니었던 만큼 동선이나 매장 배치 측면에서 쇼핑몰이라고 할 수 없는 구조였다”며 “분양자 3,000여명 대부분이 재임대 수익을 기대했지만 불경기가 겹치면서 대부분 공실이 발생하자 역사 앞에서 시위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민자역사가 사실상 끝장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쇼핑몰 특성상 오픈 이후 3년이 아주 중요한데 ‘오픈 빨’도 제대로 못 누리고 바로 슬럼화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법적 책임을 떠나 현대산업개발도 고민이 깊어졌고 결국 유통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이때 ‘소방수’로 투입된 것이 현대백화점 기획실장 출신의 최동주 사장이었고 그의 거듭된 권유 끝에 양 대표도 당시 영업본부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초기 아이파크몰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매장은 든 곳보다 빈 곳이 많고, 상인이 손님보다 더 많았을 정도였다. 식사 때면 매장 내 배달음식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매장관리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픈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적자가 400억원에 달하는 상황에 현대산업개발에 대한 상인회의 불신이 팽배해 있었고 그 상인회조차도 건물·층·업종별로 나뉘어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소통이 안 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가 상인회에 인사를 하러 다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일단 입주 상인의 마음을 얻는 게 순서였다. 어떻게든 추슬러 상인회 대표 60여명과 2박 3일 연수를 갔고 과장급 이상 20여명의 현대산업개발 직원을 데려가 분임토의·발표·식사 등을 이어가며 설득에 나섰다. 그가 상인회에 걸었던 조건은 하나다. 현대산업개발이 임대보증금을 보증하는 대신 지분과 결정권을 일임해달라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던 상인회가 긍정적으로 돌아서며 꼬박 3개월 만에 전원 동의를 얻어냈다.
◇8년 만에 흑자 전환…제2 아이파크몰 곧 가시화
그렇게 양 대표는 2005년 말 상인회의 동의 속에 온전히 쇼핑몰 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사실 고생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는 업계 1~2위를 다투는 롯데·신세계와 경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기존 유통업체의 조직과 매장·인프라를 따라 해서는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양 대표가 그때 떠올린 것이 ‘몰’이고 ‘몰링’이다. 지금은 보편화된 단어지만 당시에는 미국·일본에서나 자리 잡은 쇼핑채널이었다. 국내에서는 ‘인터넷몰’ 정도나 떠올리는 수준이었다.
그는 “1988년 만들어진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은 형태만 스트리트몰이었지 체계적인 매장 구성이나 관리가 이뤄지지 못해 엄밀한 의미에서는 ‘몰’이 아니었다”며 “진정한 몰은 한 기획자, 관리주체가 전체 시설을 운영·관리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아이파크몰은 조금씩 소비자의 쇼핑 동선을 재정비하고 키 테넌트를 늘려가면서 적자를 줄여갔다. 2006년에는 아이파크백화점을 오픈하고 패션·가전·리빙 등 카테고리별로 매장을 재배치했다. 2007년에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리빙관과 문화관을 오픈했으며 사무·지원업무 공간을 옮겨 매장을 늘렸다.
매장 유동인구를 늘리기 위해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부문도 대폭 강화했다. 2011년 말에는 아이스링크를, 2012년에는 풋살경기장과 워터파크를 오픈했다. 같은 해 키덜트 수요를 노린 성인 취미용품점 ‘토이&하비’를 열었다. 2013년에는 풋살경기장을 총 4개로 확장했다.
이처럼 경쟁력 없는 매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흑자로 돌아서는 데 꼬박 8년여가 걸렸다. 2013년 매출은 2,442억원에, 영업이익도 흑자 전환한 151억원이 됐다. 제2의 도약기라고 판단한 양 대표는 2015년 △면세점 사업 진출 △글로벌 경쟁력 강화 △해외시장 진출 △2025년까지 제2·제3 아이파크몰 출점 등을 골자로 하는 ‘비전 2020’ 실행전략을 선보였다. 이 모든 것이 완료되는 오는 2020년이 되면 매출은 면세점을 포함해 1조2,000억원이 된다.
3년이 조금 안 된 현재 ‘비전 2020’은 7부 능선을 넘어섰다. 2015년 말 신라호텔과 함께 HDC신라면세점을 오픈해 유통채널을 다각화했고 지난해부터는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증축을 시작해 최근 마무리 지었다. 지난해까지 매출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영업이익은 두 배 가까운 289억원으로 늘어났다. 또 원래 목표였던 중국 시장 진출은 사드보복 사태 등으로 보류됐지만 2호점 출점은 조만간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양 대표는 “현재 현대산업개발이 수주한 서울 노원구 광운대역 부지, 서초구 구반포 제3주구 등에 참여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부산 금융단지 등 여러 곳에서도 문의가 있어 조만간 제2 아이파크몰 계획이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재유기자 0301@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양창훈 대표는 △1959년 서울 △1977년 서울 동북고 △1982년 중앙대 경제학과 △1984년 현대그룹 입사 △1997년 현대백화점그룹 기획실 신사업개발팀장·전략기획부장 △1999년 현대백화점그룹 현대유통연구소 소장 △2005년 현대아이파크몰 영업본부장 △2010년~ 현대아이파크몰 대표이사 △2015년 한국민자역사협회 회장 △2015년~ HDC신라면세점 공동대표 △2018년 HDC아이파크몰 대표이사(사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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