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감독을 받는 관계의 하급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문환 전 주(駐) 에티오피아 대사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최근 수행비서 김지은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판결과 대비된다. 두 사건 모두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가 적용됐지만, 재판부가 사건 전후 사정과 피해자의 태도 등을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따라 두 사건의 유·무죄 판단이 갈린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박주영 판사는 12일 김 전 대사가 업무상 하급 직원을 업무상 위력에 의해 간음한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김 전 대사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성관계가 합의 하에 이뤄졌으며, 업무상 지위나 위세를 이용해 간음하지도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 전 지사가 비서 김지은씨를 간음한 혐의를 두고 “‘위력’이라 볼 만한 지위와 권세는 있었으나 이를 통해 자유의사를 억압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던 것과는 상반된 결론이다.
다른 판결이 나온 요인 중 하나는 사건 전후의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에 대한 법원의 관점이다. 안 전 지사 사건에서 재판부는 사건이 발생한 전후에 김지은씨가 보인 행동이나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문자 내용 등을 근거로 무죄판단을 내렸다. 김씨가 제3자에게 안 전 지사에 대한 우호적 표현을 하는 등 가해자와 피해자가 업무적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는 심리적으로 얼어붙는 상황일 정도로 매우 당황해서 바닥을 보며 중얼거리는 식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음 후 아침에) 러시아에서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으려 애쓴 점, 귀국 후 피고인이 다니던 미용실을 찾아가 머리 손질을 받은 점 등이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반면 김문환 전 대사의 경우 재판부는 “두 사람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업무상 관계 외에 친분이 없고, 당일에도 이성적인 호감이 발생했다고 볼 만한 사정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피고인이 업무시간 외에 술자리를 자주 마련했는데, 이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피해자가 당일 ‘숙제하듯 의무적으로’ 피고인과 테니스를 치고 저녁 식사 요청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하며 “평소 피고인의 지위와 피해자와의 관계 등에 비춰보면 성추행을 지적하며 단호하게 항의하기 어려웠다는 피해자의 진술은 수긍이 간다”고 밝혔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의 태도를 ‘받아준다’고 생각했다는 김 전 대사 측의 주장도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불안과 공포로 얼어붙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갑자기 이성적 호감이 생겼을 만한 사정이 없는데, 과연 피해자의 어떤 행동으로 ‘받아줬다’고 생각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두 사건은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도 달랐다. 안희정 전 지사 사건의 재판부는 비서였던 김 씨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안 전 지사와의 텔레그램 대화 내용을 일부 삭제하고 증거로 제출했다는 점과 김씨의 진술이 다른 증인들의 진술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김지은씨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김문환 전 대사 사건 재판부는 “애초에 피해자가 먼저 진정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외교부가 다른 성폭력 행위를 조사하던 중에 이 사건이 밝혀졌고, 오히려 피해자는 진술을 꺼린 사정도 있다”며 “그런 사정을 보면 피해자가 달리 허위로 진술할 만한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다원인턴기자 dwlee618@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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