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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별세] 대표적 1세대 여성 기업인…삼성家 화합 애쓴 '맏어른'

1991년 삼성그룹 분리 이후

제지 투자·계열사 확대 총력

한솔그룹 도약 이끈 주인공

7년전 이맹희·건희 소송전

1심후 두 아우에 화해 권유

문화예술에 깊은 안목·애정

재단 세워 후원…소장품 기증

고(故) 이인희(왼쪽) 한솔그룹 고문이 지난 2012년 1월4일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두을장학재단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두을장학재단은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의 유지를 기려 2000년 1월 설립된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여성 전문 장학재단이다. /서울경제DB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룹을 맡겼을 큰 재목인데….”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을 일러 남긴 말이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경영자로의 용기와 여성으로의 섬세함은 물론 소박한 생활 태도까지 갖춘 맏딸을 특히 아꼈다. 삼성가(家) 4남6녀의 맏이인 이 고문은 큰누나·큰언니로 가정의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여성 경영인으로 꼽히는 이 고문이 30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이 고문은 1929년 이 선대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맏이로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맏딸이면서도 9명이나 되는 동생을 자상하게 돌봤다. 대구여중과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다니던 중 지난 1948년 조운해 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과 결혼해 3남2녀를 낳았다.

이 고문이 경영 일선에 뛰어든 것은 1979년으로 만 50세 때다. 호텔신라 상임이사로 취임해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전관 개보수와 제주신라호텔 신축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경영능력을 입증했다. 섬세한 감성을 활용해 신라호텔을 외국계 체인 호텔보다 앞서는 정상급 호텔로 키웠다. 1983년 전주제지 고문으로 취임해서는 공격 경영을 선보였다. 적극적인 투자를 주도해 회사가 국내 최대의 제지회사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 고문이 경영능력을 입증하는 시험대에 올라선 것은 19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돼 ‘제2의 창업’을 했을 때다. 이 고문은 사명을 순우리말인 ‘한솔’로 바꿨다. 한글 사명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대단한 파격이었다.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과 자신감에서 나온 결정이라는 후문이다. 1993년에는 새로운 경영이념을 선포하고 삼성과 차별화된 ‘한솔 시대’를 여는 동시에 인쇄용지·산업용지·특수지 등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해 한솔제지를 종합제지기업으로 도약시켰다. 아울러 한솔홈데코·한솔로지스틱스·한솔테크닉스·한솔EME 등 다수의 계열회사를 설립해 한솔을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키웠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왼쪽)과 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가 2010년 2월5일 오후 서울 서소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 선대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서울경제DB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솔이 1996년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로 선정되면서 차남인 조동만 전 회장에게 ‘한솔PCS 018’ 사업을 맡기고 그룹의 역량을 모아줬다. 그러나 이동통신 사업자 간에 과당경쟁이 벌어졌고 선발주자에 비해 자금력이 부족했던 한솔은 결국 KT에 사업을 매각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동통신 사업의 실패는 한솔그룹 전체의 발목을 잡으며 당시 함께 삼성에서 분리된 신세계나 CJ처럼 사세를 넓히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 고문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인 1998년에는 그룹 구조조정위원장을 맡아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는데 일본 NHK는 이 과정을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꼽기도 했다.

문화예술과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이 도자기·회화·조각 등을 수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1995년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문화예술계를 후원하고자 한솔문화재단을 설립해 개인 소장 예술품을 기증했다. 2013년에는 한솔오크밸리에 ‘뮤지엄 산’을 개관했는데 한솔그룹은 이를 ‘이인희 고문 필생의 역작’이라고 강조한다.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작품일뿐더러 세계적인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아시아 최초로 4개나 설치하는 등 탁월한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뮤지엄 산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부친 이병철 선대회장과 이인희 고문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한솔그룹


한솔그룹 관계자는 “뮤지엄 산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다른 곳에는 없는 꿈 같은 뮤지엄’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인정받았다”면서 “이런 찬사 뒤에는 이 고문의 문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고스란히 숨어 있다”고 소개했다.

여성으로, 어머니로의 섬세함이 곳곳에 배인 곳은 강원 원주의 한솔오크밸리 리조트다. 이 고문이 리조트 내 사업장 곳곳의 음식 메뉴 하나하나뿐 아니라 장맛까지 직접 챙긴 사실은 회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러나 오크밸리는 현재 자본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는 상태다.

이 고문은 여성계를 위해서도 공헌했다. 2000년 어머니 박 여사의 유지를 기려 국내 최초의 여성 전문 장학재단인 두을장학재단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사장을 맡아 여성인재 발굴과 지원에 앞장섰다.

삼성가에서 이 고문의 위상은 큰누나·큰언니 이상이다. 가족의 화합을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동생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조카들이 이 고문을 ‘맏어른’으로 모시는 것은 재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12년 이 선대회장의 장남 고(故)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동생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상대로 낸 유산분쟁 소송 당시 1심에서 이건희 회장이 승소하자 이 고문은 “이번 판결로 집안이 화목해지기를 바란다”며 아우들의 화해를 권하기도 했다.

한솔그룹 관계자는 “따뜻함과 섬세함을 지닌 여성이지만 경영에서는 누구보다 담대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보인 이가 바로 이 고문”이라면서 “집안에서는 맏이로 가족의 화합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한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발인은 오는 2월1일 오전7시30분이다. 유족은 자녀인 조동혁 한솔케미칼 회장, 조동만 전 부회장,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조옥형·조자형씨가 있다.
/맹준호기자 nex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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