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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이 만난 사람]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가들 3·1운동 이후 '民이 주인되는 나라' 꿈꿨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자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지청천 장군 26년간 최일선서 무장투쟁·가족들도 독립운동 지원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임정 계승' 돼있는데 부정하는 인식 바꿔야

3월1일부터 한달간 독립선언서·태극기 원본 공개...해외전시도 추진

광복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3·1운동이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의 모태가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권욱기자




대담: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3·1운동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독립만 추구했다고 흔히 생각하는데 독립 이후 민(民)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꿈과 구상을 다듬었습니다.”

이준식(63·사진) 독립기념관장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 이후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을 만들고자 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관장은 지난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창설된 광복군 총사령관인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1888~1957) 장군의 외손자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과 근현대사기념관 관장에 이어 2017년 12월부터 독립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물론 외할머니(윤용자), 어머니(지복영), 외삼촌(지달수), 이모부(심광식)까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공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광복군 초모(招募·군인모집) 활동 등을 한 그의 어머니는 1995년 항일무장 독립운동과 지청천 장군의 업적을 다룬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를 쓰고 2015년에는 자서전인 ‘민들레의 비상’을 남겨 독립운동사를 생생히 증언했다. 책을 읽노라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풍찬노숙하는 독립운동가의 헌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관장은 “광복되고 정부에 참여한 분들을 제외하고 대체로 독립운동가는 제대로 된 예우를 받기는커녕 독립운동했다는 사실조차 입에 담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며 “형편이 어려워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 시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개탄했다.

그는 우선 ‘선대의 유지를 받들기가 버겁지 않느냐’고 묻자 “제가 돌이 되기 전 돌아가신 지 장군은 저를 굉장히 예뻐하셨다고 들었다. 어려서는 선대의 독립운동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인 줄 잘 몰랐다. 조상 자랑하는 것이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친일파 후손이거나 후계자인 현실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모든 분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지 장군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로 3·1독립만세운동을 꼽았다. 일본 육사를 나온 지 장군은 육군 중위일 때 도쿄 2·8독립선언에 이어 3·1운동 소식을 듣고 ‘때가 됐다’고 판단해 일부러 각혈을 하며 “결핵에 걸렸다, 고향에서 쉬어야겠다”고 일제를 속여 서울을 거쳐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일본 육사 3년 선배로 이후 만주 등에서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김경천 장군도 망명했는데 이들은 서울에서 술꾼으로 행세하며 일제의 눈을 피했다. 지 장군은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 선생 등이 서간도에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한다. 이 관장은 “지 장군이 일본군의 지도와 병서를 갖고 망명해 독립운동 진영에서 일본군의 전략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지 장군은 신흥무관학교가 1920년에 폐쇄되자 밀산으로 이동했다가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 선생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합세,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여단장으로 일본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인다. 거점을 소련 연해주로 옮겨 독립군부대를 고려혁명군단으로 개편한 뒤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을 맡았으나 일제와 타협한 소련의 배신으로 1921년 수백여명의 독립군이 숨진 자유시참변에 휘말린다. 당시 장군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형 집행 직전 석방돼 만주로 돌아온다.

1924년 정의부 중앙위원과 의용군 총사령관으로 국내 진격작전을 벌였고 1930년 홍진 선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자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 관동군과 대전자령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중국군의 배신으로 일본군에 패해 감옥에 갇힌다. 이후 중국 관내로 이동해 김구 선생 주선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의 낙양군관학교 한인지도자 책임자로 활동하고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광복군은 중국 여러 곳에 지대를 설치하고 영국군과 인도·미얀마에서 공동작전을 펴고 미군 OSS(CIA 전신)와는 전투기와 잠수정으로 한반도침투작전을 벌이기 위해 훈련을 하다 광복을 맞았다. 이 관장은 “지 장군은 말년에 ‘1930년대 초까지 만주에서 직접 일본군과 싸우며 독립운동하던 때가 가장 보람 있었다’고 말씀하시고는 했다더라”고 소개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외삼촌도 1924년 지 장군을 찾아 만주로 갔으며 광복될 때까지 만주벌판과 중국 관내를 옮겨 다니며 갖은 고초를 겪었다. 어머니는 10대 후반에 광복군에 입대, 사령부에서 기관지 발행업무를 하다가 선전·초모 활동을 했다. 이 관장은 “지 장군은 딸에게 ‘한국의 잔다르크가 돼라’고 하셨다”며 “동포가 많은 곳은 일본군 점령지가 대부분이고 누가 밀정인지도 몰라 2년여의 초모 활동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고 설명했다. 외할머니는 자식 셋 데리고 만주로 가서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도 농사를 지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1940년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만들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 관장은 “외할머니는 굉장히 강인한 여성으로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뿌듯해했다. 현재 여성 독립운동가 비율이 3%에 불과한데 온갖 간난신고를 감수한 독립운동가의 부인들에게도 서훈해야 한다는 것이 이 관장의 지론이다.



이 관장은 다시 3·1운동으로 돌아와서 “거족적·평화지향적 독립운동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거쳐 대한민국이 탄생한 토대가 됐다”며 “최소 200만명이 참여해 6,000~8,000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되나 확인된 경우는 극히 일부다. 기록을 빨리 찾아 명단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근 독립기념관이 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144명)을 펴내고 2024년까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완간을 목표로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어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돼 있지만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 등도 승인했다. 이런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사회 일각의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고 의지를 보였다.

그는 “1930년대로 넘어가면 대부분 독립운동 단체가 남녀평등, 전 국민 참정권, 의무교육, 중요한 생산기관과 토지의 국가 소유,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 등 표방하는 게 비슷해졌다. 오늘날의 우파적 마인드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1940년대 중국 화베이 지역에서 공산당 팔로군과 항일연합투쟁을 활발히 벌인 조선독립동맹의 강령도 대동소이했다는 것. 이 같은 분위기는 제헌헌법으로 이어져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넣는다든지 놀랄 정도로 평등 지향적이고 자유·민주주의를 보장하게 된다.

좌파 독립운동가 서훈에 관해서는 “벽초 홍명희 등 북한정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도 많은데 북한에서 1950~1960년대 여러 차례 숙청당했다. 다만 이분들에 대한 서훈은 평화통일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하는 게 좋다. 지금은 시기상조다. 북에서 숙청당한 분들을 서훈하면 남북 사이에도 미묘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 선생의 경우 올해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사업도 제대로 하고 역사적인 복권을 먼저 하는 게 급선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은 서훈할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독립기념관 전시와 관련해 “독립군 전투장면 모형을 만드는 등 체험 쪽으로 바뀌었다. 총 7개 전시관 중 3곳에서 3월1일부터 한 달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의 원본을 공개한다. 오는 28일에는 정부 주관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전야제’도 크게 연다. 국내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체험전시관도 선보인다. LA·뉴욕·상하이·도쿄 등 해외 순회전시에도 나선다”고 설명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한 무명 독립군의 기념탑 건립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3·1운동 당시 우리 민족은 수개월에 걸쳐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죠. 분단체제나 동족상잔의 한국전쟁도 일제 강점기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이제는 평화체제와 통일노력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정리=고광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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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부산생 △1980년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1991년 연세대 문학박사 △1999~200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특별연구원 △2002~2005년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2005~2006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 △2006~2010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2012년 황조근정훈장 △2013~2017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2016~2017년 근현대사기념관 관장 △2017~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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