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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인들<6>조마리아 여사] 아들 안중근 죽음 앞서도 의연했던 臨政의 '정신적 지주'

나약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삶

독립투쟁 가시밭길 만류 않고

이토 저격 의거 정당성 밝히려

조선인 변호사 백방으로 수소문

항소 않고 일제에 맞서는 아들에

"대한 남아 기개 보여라" 격려

안 의사 순국 후 臨政 뒷바라지

경제후원회 위원으로 적극 활동

곤궁한 정부 살림 물심양면 돕고

상하이·연해주 타향살이 한인

따스이 위로한 상징적 지도자





다가오는 3월26일은 지난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이 뤼순(旅順)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이 집행돼 순국하신 지 109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은 죽기 직전에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불효를 용서해달라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당시 안중근은 부인(김아려 여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어머니에게 못 다한 효도를 부탁했다.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요….”

이 편지를 전해 받은 어머니 조성녀(趙性女·가톨릭 세례명을 붙여 ‘조마리아’로 불림) 여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성녀는 1862년 백천 조씨 가문에 태어나 황해도의 개화한 안태훈(安泰勳) 진사 집안에 시집와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 잘 아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데, 과연 안중근은 어렸을 때 조마리아 여사에게 어떤 아들이었을까? 이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으로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응칠은 안중근의 어렸을 때 이름)’를 보면 어렸을 때 자신의 성품과 기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평생 동안 특히 즐기는 일이 네 가지 있었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요,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협심이 있고 사나이다운 사람이 어디에 산다는 말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총을 지니고 말을 달려 찾아갔다.”

이런 아들이었기에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이 가족과 고향을 떠나 해외에 나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일들을 하겠다고 했을 때 자식을 만류하지 않고 잘 되기를 기원했다.

몇 년 동안 멀리 낯선 외국 땅에서 생사조차 확인하기 힘들었던 자식 안중근은 이제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서 대한 독립의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린 알린 장한 독립운동가가 됐다. 조마리아 여사는 당장이라도 뤼순감옥으로 가서 자식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1909년 10월26일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일본 경찰에 둘러싸여 심문을 받고 있다. 안증근은 이로부터 5개월 후인 이듬해 3월26일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당시 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일본 검찰과 법원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한국의 우매한 사람이 저지른 개인적 살인 사건으로 폄하시키기 위해 그의 재판과정을 이용하려고 했다. 이에 안중근은 몇 년 만에 고향인 진남포에서 면회 온 두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에게 한국인 변호사를 요청했다.

독립운동가를 직업으로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뤼순으로 가서 아들을 면회해 보고 싶겠지만 자식이 한 일을 폄하하고 오히려 살인자로 뒤집어씌우려는 일제에 대항해 자식이 한 일이 대한 독립을 위한 정당한 의거임을 밝혀주는 것이 더 급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일제의 감시와 방해를 피해 당시 한성변호사회가 추천해준 평양의 안병찬 변호사를 만나는 등 아들의 변호를 의뢰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그리하여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은 안중근 재판에는 참석했으나 변호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방청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제의 의해 재판 과정이 통제되고 자신의 의거가 가지는 의미가 왜곡되는 상황에서 안중근은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 항소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저항하고자 했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명확히 지적해 일제가 한국 침탈과정에서 저지른 불법과 잔혹한 폭력행위들을 규탄했다. 나아가 죽기 직전까지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해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제의 주장과 논리를 반박하고 진정한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독립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일제와 싸우는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식에게 편지를 보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여 대한 남아의 기개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라고 격려했다.

자식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는 슬픔과 아픔도 잠시일 뿐이었다. 이제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일가는 한일 강제 병합 후 한국땅에서 끊임없이 일제의 탄압과 회유를 받는 대표적인 감시 대상이 됐다. 이로 인해 더욱 살기 힘들어지자 결국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의 동생들과 그 가족들을 데리고 머나먼 연해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는 몇 년 전 자식인 안중근이 활동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조국 독립의 의지를 북돋아 주고 의병장으로 일본군과 싸운 전쟁터였다.

기록에 의하면 1910년 10월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일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연해주의 ‘코르지포’와 근처 조선인 마을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에 이주해 살게 됐다. 그러나 이곳까지 일본의 탄압과 손길이 미치자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일가는 상하이로 이주했다. 그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돌아가실 때까지 상하이 조계 내에 독립운동가들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죽은 자식 대하듯 돌봐주고 챙겨줬다.

나아가 임시정부의 어려운 재정 상황에 도움이 되고자 ‘임시정부 경제후원회’가 결성되자 조마리아 여사는 준비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 나섰다. 1927년 7월19일 상하이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상하이 삼일당(三一堂)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임시정부경제후원회는 모든 회원으로부터 세금을 받고 매년 1인당 1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아 임시정부의 경제적 궁핍을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위원장에는 안창호, 위원에는 조마리아 여사, 김순애(김규식 부인) 등이 선출됐다.

이미 조마리아 여사는 1907년 안중근과 두 동생이 국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때 적극 나서 자신이 간직한 귀중한 은장도·은귀걸이·은비녀 등 패물들을 내놓았다. ‘삼화항 은금폐지 부인회’의 한 사람으로서 조마리아 여사가 보여준 솔선수범의 행동은 당시 신문 ‘대한매일신보(1907년 5월29일자)’에 보도될 정도였다. 당시 조마리아 여사뿐만 아니라 상하이에 거주하는 많은 독립운동가의 부인과 어머니들은 임시정부의 재정과 생계를 챙겨야 했다. 일제에 총으로 싸우고 세계 언론에 호소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하는 일은, 뒤에서 보이지 않게 헌신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와 부인들의 커다란 희생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10년 3월 안중근의 순국 이후, 연해주와 상하이에서 조마리아 여사는 죽은 자식이 남긴 ‘대한 독립’의 유지를 지키면서 나라 없는 국민들의 설움을 겪고 추운 환경에서 이주해온 한국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과 일제의 탄압, 그리고 경제적 궁핍함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해 많은 한국인이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 조마리아 여사는 늘 곁에 있으면서 의지하고 싶은 우리들의 어머니였다.

조마리아 여사는 자신의 3남 1녀 자식 안중근, 안정근(安定根), 안공근(安恭根) 및 안성녀(安姓女)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와 부인들을 대표하는 상징적 지도자였다. 또 그녀는 많은 한국인이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임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안중근의 어미니’를 보면서 용기와 힘을 얻는 정신적 지주였다.

몇 년 동안 떨어져 있던 자식이 죽은 후, 그 무덤에라도 찾아가고 싶은 게 어머니와 가족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당한 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어 찾아가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었다. 자기 자식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었던 조마리아 여사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면서 감사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 상하이에 조마리아 여사가 묻힌 묘지터도 지금 어딘지 찾을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조 여사의 무덤터라도 찾아서 그 앞에 한 송이 꽃을 놓으면서, 이제는 저 세상에서 편안하게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시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해본다.

김현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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