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립을 꿈꾸는 ‘파이어(FIRE)족’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과 ‘조기 은퇴(Retire Early)의 앞글자를 조합한 신조어다. 20대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 소득의 70% 이상은 저축하고 40대 초반까지 조기 은퇴를 목표로 하는 미국 밀레니얼(1981~96년 출생) 세대 중심으로 확산됐다. 파이어족의 발생 배경과 이들의 목적이 한국 젊은이들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한국 젊은이들의 짠테크를 연상시킨다. 직장에서 성취감을 못 느끼거나 학자금 대출 상환 부담, 전통적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불안, 전반적인 저성장 기조 등의 시대적 요인들이 미국과 한국, 나라는 달라도 젊은 세대들이 사는 시대의 공통 분모이기 때문이다.
남들 사는 만큼은 살아야 된다거나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기성세대들과 달리 본인 인생의 행복과 본질을 추구하는 솔직한 개인주의 성향 또한 파이어족 트렌드에 부합되고 있다.
이 트렌드는 일면 긍정적인 면이 있다. 우선 40세 초반 은퇴 이후 인생의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면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생활 측면에서 보면 가성비를 극대화한 소비를 위해 대체 방안을 간구하게 된다. 조기 은퇴란 목표를 정하면 삶의 디테일 모두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기꺼이 내 삶의 모든 점을 변화시킬 의지가 있더라도 파이어족의 트렌드를 따라 하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파이어족은 고소득층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40세에 조기 은퇴할 만큼의 목돈을 모을 수 있는 반면 평균적인 직장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은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노총이 이번 1월에 발표한 ‘2019 표준생계비 산출 결과’에 따르면 노동자 2인 가구의 한 달 평균 생활비는 394만원이며, 1인 가구는 월 평균 225만원이다. 2인 가구가 40세에 은퇴하여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2017년 기준 국민연금연구원의 ‘중고령자 경제생활 및 노후준비 실태’ 보고서에 실린 연령별 적정 생활비를 감안해서 계산해보면, 노후 40년 동안의 생활비 10억5,000만원의 현금을 모아야 하지만 이는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금액이다.
둘째, 고소득층이어서 목표 금액을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 금액이 남은 미래에도 적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우선 물가상승률까지 반영해서 계산하는 사람은 드물고, 물가상승률을 상쇄시킬 만큼 안정적인 금융상품을 찾아 저축한 원금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셋째, 무엇보다 인생의 변수를 어떻게 40세에 예측할 수는 있을까. 변수란 기간이 길어지면 많아지는 법, 100세시대라고는 하지만 현 젊은 세대들의 수명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는 모른다. 박유성 고려대 통계학과 교수는 1954년생 남자 기대수명을 82.8세로 발표하면서 이들의 10명 중 4명이 98세 생일을 맞이한다고 예상했다.
파이어족 트렌드란 결국에는 노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와 연결된다. 조기 은퇴를 하든, 평균적인 60대에 은퇴를 하던 우리의 인생은 모두 노년이란 종착점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42.195km의 장거리 마라톤에서 16km를 전력 질주하고 나머지 구간을 천천히 갈지, 전 구간을 일정 속도로 갈지는 선택의 문제다. 중요한 점은 노년의 골인지점까지 완주하는 과정에서 재무적이든, 정서적이든 목표를 한번 설정하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변수에 현명하게 대처하며 인생의 항로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유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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