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만 해도 그날 일하고 받은 일당이 술값을 내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 일하고 술값으로 쓰면 남는 게 없어요. 오히려 부족해서 외상만 쌓이죠.”
11일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성수동 수제화 거리’의 제화공장에서 만난 임영훈(61·가명)씨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신발 밑창을 찍어내는 철형을 만드는 제화공으로 40년을 일했다. 임씨는 “지난해에 비해 일감이 반 이상 줄어든 것 같다”고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임씨의 수입이 줄어든 것은 그에게 일감을 주는 하청업체들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전국의 제화 업체 70%가 위치한 곳으로 탠디·미소페·소다 등 대형 제화 업체로부터 수주를 받는 하청공장들이 모인 대표적인 수제화 제조 집적지다. 하청업체로부터 일감을 나눠 받는 제화공도 성수동에만 2,000여명이 있다. 하지만 신발 산업 자체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데다 원청이 값싼 인건비를 앞세운 중국·동남아시아 등에 일감을 주면서 하청업체의 경영난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여기에다 지난해 4월 ‘탠디 집회(탠디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는 제화공들이 벌인 투쟁)’를 계기로 공임이 5,500원에서 7,000원으로 껑충 뛰면서 하청업체들은 인건비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 국내 3위 제화 업체인 미소페가 중국으로 공장 이전을 결정한 데도 이 같은 ‘노조 리스크’의 영향이 컸다는 후문이다. 공임 인상이 제화공들에게 일감 감소라는 역설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제화 하청업체들의 여건이 그만큼 나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하청업체=“탠디·미소페·소다가 모두 제화공에게 지급하는 공임을 올리면서 우리 같은 하청업체들도 도미노처럼 공임을 올려야 했습니다. 하청을 받는 처지라 마진율도 적은데 설상가상으로 인건비 부담까지 떠안은 거죠.”
성수동에서 완제품 공장을 운영하는 김영식(55·가명) 대표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그는 “최근 3개월 사이 주변에서만 공장 50개가 문을 닫았다”며 “6~7년 전만 해도 성수동에는 500여개의 공장이 남아 있었는데 요즘은 200개가 채 안 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 대표는 “대표들 사이에 민주노총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다”며 “민주노총이 제화업에 개입하다 보니 60세 이상 고령 사장들 중에는 ‘사업을 계속할 바에는 문을 닫아버리겠다’며 체념한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말한 ‘민주노총 개입’은 지난해 4월 탠디의 하청업체 소속 제화공들이 ‘민주노총 제화지부’를 만든 것을 뜻한다. 당시 제화공들은 “20년간 공임이 5,500원대로 유지되는 게 말이 되느냐”며 공임 인상과 퇴직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40년 동안 땀 흘려 일해도 당시 최저임금인 7,530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밖에 벌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제화 업체 대표들도 제화공들의 딱한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다. 제화공 상당수는 ‘객공(客工)’으로 불리며 특수고용직의 일종인 소사장제로 고용됐다.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지 않아 최저임금을 적용받지 못하며 신발 한 켤레당 공임을 받는 방식이다. 탠디 집회 여파로 탠디가 처음으로 공임을 7,000원으로 인상했고 다른 대형 제화 업체들도 잇따라 올렸다. 세라제화는 지난해 7월 하청업체 제화공에게 4대 보험을 적용하는 단체협약을 맺기도 했다.
문제는 노조의 목소리가 커지다 보니 성수동 하청업체들이 ‘원청’과 ‘제화공’ 사이에 끼이면서 사업 유지가 불가능해졌다는 데 있다. 신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디자인→패턴 도안→재단→제갑→저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원청에서 신발 디자인을 정하면 하청은 이에 맞춰 신발의 본(패턴)을 도안하고 이를 재단한다. 이후 제화공은 도안에 따라 갑피와 신발 밑창(저부)을 제작한다. 하지만 하청업체가 원청업체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수입이 줄면서 인건비 증가는 고스란히 경영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해외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맡기는 원청이 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수제화 수출액은 지난 2000년 2억6,000달러(약 3,100억원)에서 2017년 7,500만달러(약 853억원)로 줄어든 반면 수제화 수입액은 같은 기간 1억1,000만달러(약 1,253억원)에서 8억9,000만달러(약 1조원)로 급증했다.
이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제화공들의 처우 개선에 심적으로 동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우리 사정도 이해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성수동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이유형(52·가명) 대표는 “공임 인상을 이끌어낸 만큼 제화공들에게 그에 맞는 공임을 주고 싶지만 하청공장의 상황이 너무 어렵다”며 “원청이 해외 OEM을 늘리면서 하청의 주문량이 줄어든 만큼 제화공들이 자신의 몫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백화점·홈쇼핑 수수료 낮춰준다지만=정부와 청와대는 유통수수료를 낮추는 쪽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모양새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서울 성동구 성수수제화희망플랫폼에서 청와대·정부와 연 현장간담회에서 “27만5,000원짜리 백화점 구두가 제화공에게는 7,000원밖에 남겨주지 못한다”며 “백화점 수수료가 40%에 달하는 만큼 이를 줄이면 원청은 물론이고 하청·제화공들에게도 유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과 민주노총에 따르면 현재 구두 한 켤레당 마진을 유통 업체가 38%, 원청업체가 44%를 가져가고 있다. 하청업체에는 전체의 13%, 제화공에게는 5% 정도만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수수료가 잡화 평균 수준으로 3%포인트만 낮아져도 한 켤레당 9,000원의 몫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는 게 민주당 측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처럼 유통수수료를 억제하는 정책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김익성 동덕여대 교수는 “구두 수수료 문제를 건드리면 패션 등 다른 상품군에서도 ‘수수료 인하’를 요구할 수 있어 전반적인 유통수수료 체계를 흔들 수 있다”며 “지금은 불경기인 만큼 유통 플랫폼 같은 제3자를 개입시켜 갈등 폭을 키우는 것보다 원·하청과 제화공이 자체적으로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갈등을 최소화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심우일기자 vit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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