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러시아인 A(34)씨는 한국말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데 문제가 없어 통·번역 인력 없이 두 차례 형사사건의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한글을 제대로 몰라 검찰이 제시한 증거서류 등을 이해할 수 없었다. A씨는 외국인에게 통·번역 인력을 지원하도록 재판 예규에 규정돼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절차상 하자’를 근거로 재판의 무효를 주장했다. 담당 재판부는 “외모나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을 봤을 때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실수를 인정했다.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외국인 재판 과정에서 통·번역 인력이 원활하게 지원되지 않아 재판이 무효가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외관상 한국인과 비슷하거나 한국말에 비교적 능숙해 외국인이 먼저 요청하지 않으면 재판부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서다.
통·번역 인력과 피고인 간의 일정을 잡기 쉽지 않다는 점도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 외국인 재판 지원을 위해 법원에서 지원하는 통·번역 인력은 서울 지역만 600명에 육박한다. 지난달 기준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191명, 동부지법에 81명, 서부지법에 177명, 남부지법 45명, 북부지법 93명으로 총 587명이 등록돼 있다. 이들 중 동시에 2~3개 법원을 맡는 중복 인원 일부를 제외해도 500명이 넘는다.
하지만 예산 등의 문제로 해당 통·번역 인력들은 법원에 상주하지 않고 그때그때 사건이 있을 때마다 법원의 연락을 받고 지원을 나간다. 이렇다 보니 시간이 맞지 않으면 재판 기일에 맞춰 미리 서류의 내용을 숙지하도록 돕는 데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재판 과정에서 통·번역 인력 지원이 빠진 것을 알면서도 숨기고 있다가 선고 전 결심 공판 때가 돼서야 부당함을 알리며 악용하는 외국인들도 생겨나고 있다.
법원에서는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280만명을 넘어선 만큼 외국인 통역 인력을 법원직 공무원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11년 전인 지난 2008년에 외국인 재판부를 맡아 사건을 담당했던 한 판사는 “예전에는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가 많지 않아 재판부 재량에 따라 비상근 통역 인력을 구해 사건 처리가 가능했지만 외국인이 갈수록 늘어나는 만큼 제도화한 상근 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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