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트라우마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나를 소유한다는 말이 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통제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나와 비슷한 상처를 앓고 있는 다른 사람을 보면 트라우마가 재활성화된다. 난 괜찮아, 트라우마는 날 괴롭힐 수 없어, 라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날 문득 과거의 안타까운 기억이 나를 결박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한 경험은 오랫동안 내 인생을 지배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말끔히 삭제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도 무너져버렸다. 그땐 몰랐다. 트라우마가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 트라우마 때문에 성격 자체가 바뀌어버릴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마침내 트라우마를 이겨낼 힘이 ‘내 안의 용기’에서 우러나온다는 것도.
내 삶의 한가운데 영원한 트라우마의 기억으로 남았던 말들, 그러나 이제 내가 끝내 이겨낸 타인의 말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질책이었다. 과학실험실에서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교사의 지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실험을 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비커를 깨고 말았다. 그전에도 ‘담임선생님이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러 번 주눅이 든 나는 깨어진 비커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선생님이 왜 날 싫어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비커가 깨지자마자 선생님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50명이 넘는 아이들 앞에서 나에게 ‘세 글자’의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또 너니?”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그전에도 뭔가를 깨거나 엎은 적이 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의 실수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 같았다. 아이들도 겁을 먹어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쥐죽은 듯 고
요한 교실에서 선생님의 멸시 어린 시선을 받으며 깨진 비커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얼굴은 빨개지고,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눈물조차 흘릴 여유가 없었다.
그 선생님께 여러 번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 얼음장처럼 차갑게 노려보는 선생님의 시선에 정말 내 몸이 얼어 붙어버릴 것만 같은 기억들도 아직 아프다. 학교에 가기 싫었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싫었고, 무엇보다도 아무에게도 그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이 더욱 슬펐다. 선생님이 먼저 나서서 나를 왕따로 만들어버리니 아이들도 함께 나를 왕따로 몰아버린 것이다. 왕따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나는 나중에 왕따가 사회문제가 된 이후로 내가 당한 것이 왕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나에게 영원히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었다. ‘아무에게도 내 아픔을 말할 수 없다면, 나는 과연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불안을, 그 어린 나이에 느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를 그 공포로부터 조금이나마 구해준 ‘나 자신의 용기’가 생각났다. 나는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무슨 용기가 어떻게 샘솟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편지로 간절하게 물었다. “선생님, 왜 저를 미워하세요. 저를 도대체 왜 미워하시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아주 길게 썼지만 지금은 이 문장만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바로 그 편지 이후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선생님은 나를 대놓고 따돌리지 않았고, 나를 투명인간처럼 대했고, 나를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사랑을 기대할 순 없지만, 또 다른 적극적인 폭력으로부터는 나를 구할 수 있었다.
그때 나에게 ‘글쓰기의 힘’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더 오래 아파하고, 더 오래 주눅 들고, 마침내 내가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나의 쓰라린 내면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때 너무 커다란 상처를 받아 영원히 친구가 없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열한 살의 나, 나의 가장 아픈 내면아이에게, 성인이 된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얘야, 걱정하지 마. 너는 나중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친구들 때문에 너무도 행복한 사람이 될 거야. 언젠가는 네 안의 빛을 알아줄 사람이 꼭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오늘도 나의 내면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너는 이겨낼 수 있어. 너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어. 그리고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참기 힘든 고통의 순간 나를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내 삶을 바꿀 용기’가 내 안에 있다는 눈부신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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