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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캐나다 위니펙 총파업

1919년 파업과 노조의 정계 진출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령 캐나다가 위기를 맞았다. 무엇보다 경제가 나빴다. 전쟁 특수를 타고 고속성장하던 경제는 주춤하고 남은 것은 고물가. 귀환한 참전용사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해 사방을 헤맸다. 제대군인의 취업은 곧 기존 노동자의 실업과 임금 하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속에서 대규모의 파업이 터졌다. 매니토바주의 주도인 위니펙에서 1919년 5월15일 오전11시를 기해 3만명이 참가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난 것. 100년 전 발생한 위니펙 총파업은 캐나다 현대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캐나다 중부 매니토바주에 불어닥친 파업의 근원은 전쟁. 1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의 공업지대인 오대호 부근과 인접한 매니토바주는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각종 병기와 탄약·군복·군화·담요를 만드는 공장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군대도 급속히 커졌다. 1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 인구 788만명의 캐나다가 보유한 군대라고는 3,100명의 육군과 막 태동한 소수의 해군이 전부. 전쟁이 한창일 때 캐나다 병력은 영국군으로 분류됐으나 모두 60만명에 이르렀다. 인구 1억명의 미국이 1차 대전에 보낸 병력이 454만명이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인구당 참전 비율은 캐나다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종전(1918년11월)과 함께 수많은 병력이 돌아왔으니 인력 수급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일반 국민들의 생활도 곤궁해지기는 마찬가지. 물가는 두 배가 뛰었으나 소득은 18%밖에 오르지 않아 가계는 더욱 가난해졌다. 노동계는 양분된 노조를 단일 노조로 통합하고 협상에 나섰지만 고용주들은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았다. 위니펙 노동단체는 찬반 투표에서 95% 이상의 찬성을 얻어 파업에 들어갔다. 경찰과 소방관들도 참여를 원했으나 노조 집행부가 말렸다. 고용주들은 파업을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몰고 갔다. 러시아혁명의 파급을 우려한 주 정부는 6월 초 왕립 북서 기마경찰대를 투입해 2명의 사망자를 내며 파업을 강제로 종결시켰다.

주목할 점은 최초의 대규모 파업과 ‘피의 토요일’로 불린 강제 유혈 진압이 빚은 결과다. 주모자들이 줄줄이 체포돼 유죄를 언도받았지만 기나 긴 법정 투쟁 끝에 법원은 혁명 음모가 없었다는 판결을 내렸다. 파업 자체는 실패했어도 대중은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던 노조에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노조 지도부는 대거 정계에 진출해 노사 문제를 의회로 가져갔다. 당국도 공권력 동원을 아꼈다. 위니펙 총파업은 유럽이나 미국과는 다른 캐나다 노사관계의 출발점이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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