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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오사카성





1615년 5월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대가 난공불락의 요새인 오사카성의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어머니 요도도노는 오사카성 성내 북쪽 야마조토마루로 달아났다. 하지만 금세 도쿠가와 군에 포위됐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자결했다. 옆에 있던 한 무사가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치는 가이샤쿠를 한 후 그도 자결했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가문은 여기서 몰락했다. 히데요시가 뒤늦게 얻은 아들 히데요리가 죽고 그의 아들도 죽었으며 딸은 처형 위기에서 불문에 귀의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후사 없이 병사했다.

오사카성은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1583년 수도 교토 인근 오사카시에 지은 거대한 성이다. 당시 오사카성은 지금보다 훨씬 컸고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한 요새였다. 히데요시는 9년 뒤인 1592년 지방 다이묘들의 불만을 달래려고 조선을 침략한다. 이때 히데요시가 거주하며 조선 침략을 진두지휘한 곳이 바로 오사카성이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에서는 조선 침략에 가담하지 않아 세력을 유지한 도쿠가와로 힘의 균형이 이동했다. 결국 도쿠가와 가문 중심의 동군과 도요토미 가문 중심의 서군이 지금의 나고야시 서북쪽 세키가하라에서 패권 다툼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이후 쇼군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히데요시의 가신들이었던 다이묘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아들 히데요리는 22세로 성장해 오사카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결국 히데요리가 교토의 한 사찰에 기증한 범종에 새긴 글귀를 트집 잡아 오사카성을 공략했다. 지루한 싸움과 협상 끝에 이에야스가 물러나는 조건으로 해자를 메우는 속임수를 써서 이긴다. 일본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가문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후에는 에도(도쿄) 막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일본 정부가 다음달 말 오사카시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이 성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공식 발표가 아니라 확정됐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인들의 기분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모쪼록 외국 정상들은 오사카성이 과거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관련된 장소라는 점이라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오현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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