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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미국에서 만나는 '사업 보국'

손철 뉴욕특파원




지난달 말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서 만난 송대현 LG전자 가전 부문 사장은 비장했다. 송 사장은 LG의 미국 내 첫 가전 공장으로 연 120만대 세탁기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준공한 뒤 기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월풀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월풀이 무엇인가. 미국에서는 세탁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기업이자 미국은 물론 세계를 통틀어 가장 큰 가전 회사다. 그런 월풀이 LG·삼성 세탁기의 인기가 치솟고 안방인 미국에서도 판매가 뒷걸음질치자 트럼프 정부에 SOS를 보내 지난해 수입 세탁기에 40~50%의 관세 폭탄을 날렸다. 고율 관세를 그대로 안고서는 미국 내 세탁기 판매가 도저히 불가능하자 LG전자는 초(超)속도전으로 공장을 지어 예정보다 6개월 먼저 공장 가동에 돌입했다. 아직은 현지 인력들의 숙련도가 낮아 목표 생산량의 절반 정도만 맞추고 있지만 회사 측은 연말까지 테네시 공장 생산성을 한국 창원공장에 버금갈 만큼 높이고 지난해보다 두자릿수 이상 판매를 늘릴 방침이다. 송 사장은 트럼프의 관세 방패를 뚫겠다고 전의를 다지며 월풀에 ‘두고 보자’고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LG전자보다 20일 앞서 롯데케미칼은 미 루이지애나주에 31억달러(3조6,000억원)의 거액을 투입해 석유화학공장을 완공했다. ‘글로벌 톱(Top) 7’ 화학 회사로 도약할 발판으로 셰일가스의 잠재력을 간파한 신동빈 회장의 승부수는 미국의 셰일 붐에 올라타며 적중했다. 특히 롯데의 대규모 투자는 굳건한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현지에서 인정을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롯데에 감사 편지를 보내고 신 회장 등 롯데 경영진을 이례적으로 백악관에 초대해 면담을 갖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지난 3월에는 SK이노베이션이 조지아주에 2조원을 투자해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착공하는 등 최근 한국 기업들의 대(對)미 투자가 봇물을 이룬다.

이에 대해 국내의 쌀쌀맞은 시선이 만만찮은 것 같다. 경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 돈 있는 기업마다 국내 투자는 미룬 채 미국 등 해외로 나가는 것이 여권과 정부 당국자들의 속내를 시끄럽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송 사장의 말이 웅변하듯 각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는 속사정을 뜯어보면 그저 한국을 등지겠다는 것과는 괴리가 크다. 그보다는 생사가 걸린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응전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SK가 미국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는 것만 해도 ‘갑’의 위치에 있는 현지 전기차 생산업체들이 자사 공장 근처에 생산시설을 확보하라고 독려 이상의 압력을 넣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의 입장은 기구하다 못해 짠하다. 월풀의 공세에 LG 이상으로 당했던 삼성 역시 미 현지에 일찌감치 세탁기 공장을 완공, 가동해 건재를 과시해야 하는데 변변한 기념식조차 열지 못하며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 미국 바이어들은 삼성 세탁기가 ‘메이드 인 USA’라는 대대적인 홍보를 기대하고 주 정부는 수억달러 투자와 수백명의 신규 고용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 당국에 먼지 털리듯 털리고 있는 삼성 입장에서는 “이 판국에 미국에 투자했다고 선전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친 듯이 무역전쟁을 확대하며 중국을 넘어 동맹인 유럽연합(EU)과 일본·인도·멕시코에까지 총질을 해대고 있다. 미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으로 여전히 대미 무역흑자가 적지 않은 한국이 그나마 트럼프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기업인들이 “한국 좀 잘 봐달라”고 백악관과 미 정부 인사들을 초청해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이 한몫하고 있다.

현지 준공식·착공식 때마다 미국에서 만난 한국 기업인들은 문재인 정부가 대기업을 내심 ‘적폐’로 여기는 분위기에 크게 실망하면서도 정부가 균열을 낸 한미 관계를 보수하고 굳건히 다지는 데 여념이 없다. 거기서 함께 애국가를 들으며 가슴에 손을 얹고 있으면 한국의 산업과 경제를 일군 기업인들의 ‘사업 보국’ 정신이 거듭 확인되면서 괜히 미안한 마음마저 생긴다.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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