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에서 요구한 ‘제3국 중재위원회 구성’ 요청을 거부함에 따라 일본 정부가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를 예고하면서 한일갈등이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은 남관표 주일대사를 초치하며 반도체 수출규제 조치에 이은 추가적인 경제보복 조치까지 예고했지만 우리 정부는 외교적 해법을 위한 대화를 제의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19일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모든 건설적인 제안에 열려 있는 입장”이라고 밝히며 외교적 해법을 강조했다. 김 차장은 이날 오후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강제징용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본 측에 제시한 대법원 판결 이행 문제의 원만한 해결방안을 포함해 양국 국민과 피해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일본 측과 논의해나갈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의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 요구에 대해서도 “일본은 청구권 협정상 중재를 통한 문제 해결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로서는 일본 측이 설정한 자의적·일방적 시한에 동의한 바가 없다”며 “일반적으로 두 국가가 중재절차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우 결과적으로 일부 승소, 일부 패소하는 경우가 많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고 장기적 중재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양 국민 간 적대감이 커져 미래지향적인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호현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정책관도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정부의 명확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에서 사실과 다른 주장이 반복되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깝다”며 일본의 주장을 재차 조목조목 따졌다.
다만 청와대는 외교적 협의를 위해 일본이 경제보복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 측은 수출규제 조치의 근거로 과거사 문제로 인한 신뢰 저하를 언급했다가 수출관리상 부적절한 사안이 발생했다고 했고, 오늘은 강제징용 문제를 거론했다”며 “일본의 입장이 과연 무엇인지 상당히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미국이 제안한 바 있는 한미일 3국 고위급 협의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유연한 입장을 갖고 있어 일본 측의 입장을 듣고 싶다. 이번에도 미국 측에서 3자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참석하겠다’고 통보했고 미국도 하자고 했지만 일본이 하지 않겠다고 했다”며 “대화를 통해 일본의 입장이 뭔지 알아야 하는데 이런 회의마저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대화가 시작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달 초 태국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만나는 방안에 대해서도 “좋은 아이디어다.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가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 차장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의 만남 가능성에 대해서도 “(김 차장은) 언제든 만날 준비가 돼 있다. 만나서 대화해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매우 건전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방한하는) 볼턴 보좌관은 정의용 안보실장과 대화할 것이고 매슈 포틴저 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자신의 상대방과 다양한 이슈를 두고 얘기할 것”이라며 “다만 한미관계는 여러 이슈가 많다. 한일 간 경제보복 조치 프레임으로만 볼 수는 없고, 북핵 프레임만으로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고노 외무상이 이날 남 대사를 초치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면서 한일갈등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했다. 특히 고노 외무상은 이날 남 대사의 모두발언 도중 말을 끊고 반박하는 결례를 저질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징용배상 판결과 관련해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로 이날 고노 외무상과 남 대사는 10시15분부터 25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날 초치 자리는 양측의 합의로 모두발언이 취재진에 공개됐다. 먼저 모두발언을 한 고노 외무상이 “한국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하자 남 대사는 “양국 관계를 해치지 않고 소송이 종결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면서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 정부의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일본 측에 강제징용 배상 해법으로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1대1로 기금을 마련해 피해자들을 돕자고 제안했던 것을 언급한 것이다. 남 대사는 이후 발언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고노 외무상은 급작스럽게 남 대사의 말을 끊고 “한국의 제안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면박을 줬다. 고노 외무상은 이후 발표한 담화에서도 “한국 측에 의해 야기된 엄중한 한일관계 현황을 감안해 한국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며 추가 보복을 시사했다.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가진 일본 경제산업성도 앞서 한국 측이 제시한 당국자 협의 제안에 대해 “신뢰 관계가 구축돼 있지 않으면 (한국과) 대화는 어렵다”며 “(수출규제는) 국내 운용의 재검토이므로 협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라고 재차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양지윤·박민주·강광우기자 y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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