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퇴근길. 직장인 A씨는 평소 가보고 싶었던 맛집에 들려 저녁을 테이크아웃 합니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맥주 한 캔 사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최애’ 영화를 보며 맥주 한 모금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행복해집니다. 아침에 챙긴 입욕제가 가방에 잘 있는지 괜히 들여다봅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A씨가 향하는 곳은 집이 아닌 인근의 호텔입니다. 혼자 느긋하게 ‘호캉스’를 즐기기 위해섭니다.
길었던 계절학기가 종강하는 날. 대학생 B씨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며칠 전 새로 생겼다는 학교 근처 PC방에서 모이기로 합니다. 친구들과 ‘5인실’에서 한바탕 떠들며 함께 게임을 할 예정입니다. 호텔을 방불케 하는 인테리어와 최신 사향의 컴퓨터. 여기에 덮밥, 삼겹살, 빙수, 스무디까지 웬만한 음식점 못지않은 다양한 음식을 클릭 한 번에 시켜 먹을 수 있으니 ‘피캉스’가 따로 없습니다.
‘호캉스’라는 단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호캉스란 호텔과 바캉스가 결합해 만들어진 신조어인데요. 유명 관광지나 휴양지 등으로 멀리 떠나는 대신 인근의 호텔에서 하루에서 이틀 정도 숙박을 하면서 주말을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피캉스’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게 느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듯 PC방과 바캉스가 합쳐져 만들어진 피캉스는 최근 화려한 인테리어와 다양한 먹거리, 편의 서비스까지 갖춘 PC방 업체가 많아지면서 생겨난 단어입니다. 이에 따라 단순히 게임만 하기보단 PC방에서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요.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최근 피캉스에 대한 게시물들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캉스와 피캉스말고도 인터넷 상에는 수많은 ‘O캉스’들이 넘쳐납니다. 북캉스(책+바캉스), 한캉스(한나절+바캉스), 몰캉스(쇼핑몰+바캉스), 애니캉스(애니메이션+바캉스), 맛캉스(맛집+바캉스), 뷰캉스(뷰티+바캉스)…. 정말 셀 수 없이 다양한데요. 이렇게 많은 O캉스는 어쩌다 생겨났을까요?
◇밀레니얼을 사로잡은 ‘컨셉’의 재미와 ‘여행의 일상화’
양제연 호텔관광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는 2030 세대의 소비 행동 패턴에 그 답이 있다고 봤습니다. 양 교수는 “4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명확한 ‘이유’가 있는 소비를 하는 반면 2030 세대는 ‘컨셉’이 있는 소비를 즐긴다”며 “호텔, 쇼핑몰, PC방 등은 누구나 쉽게 머물다 갈 수 있는 흔한 공간들이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이 식상한 공간에 바캉스라는 컨셉을 더해 일상생활 속에서도 재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행에 대한 개념이 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정란수 한양대 겸임 교수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여행 자체를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인위적으로 떨어진 곳이 아니라 내 생활 속에 있는 지역들을 여행하듯 즐기는 문화, 즉 ‘여행의 일상화’로 이어졌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이제 굳이 장거리를 가서 숙박하고, 관광하는 패턴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집과 다른 공간에서 잠만 자거나, 일상과 다른 체험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휴가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지요.
◇‘○캉스 족’ 노리는 여행업계+α
소비 패턴 변화에 따라 관련 업계도 민감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단 호텔 업계의 경우 수혜를 톡톡히 입었는데요. 그간 호텔 업계의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국제 이슈에 따라 요동치는 외국인 고객의 방문율이었습니다. 호캉스가 유행하면서 내수 시장이 늘어나 이전보다 공실률이 크게 안정되었습니다. 강남과 명동에 위치한 알로프트 호텔 관계자에 따르면 주말의 경우 객실은 거의 내국인 손님들의 차지라고 하는데요. 그는 “주말 객실이 거의 80~90% 차는데, 이 중 70~80%가 국내 고객이다. 주로 젊은 커플이나 여성 고객이 많은데, 자세한 수치를 공개할 순 없지만 이런 움직임이 최근 2~3년 전부터 급격히 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해당 고객층을 사로잡기 위해 시즌별로 인근에서 진행되는 공연 티켓이나 영화 티켓을 포함한 패키지, 어린이들과 함께 오는 부모들을 위한 어린이 패키지를 만들어 프로모션 하고 있다”고도 전했습니다.
관광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곳에서도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PC방 업계의 경우가 대표적인데요. 프렌차이즈 PC방 브랜드 중 하나인 해피로 PC방 관계자는 “단순히 인터넷이 빠르고 게임을 위한 공간으로만 인식되던 PC방이 변화하고 있다”며 “PC방 수익 구조도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PC방을 이용하는 고객이 다양화하고 E-스포츠 공간이라는 인식도 생기면서 컴퓨터 뿐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 깨끗하고 깔끔한 인테리어, 편의를 제공하는 다양한 멀티 아이템까지 신경 쓰는 방향으로 PC방 운영 방식이 변했다는 건데요.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피캉스’ 현장을 담은 게시물들이 화제가 되면서 ‘하루 종일 있고 싶다’, ‘여기 대체 어디예요’, ‘와 대박이네’ 등 대체로 긍정적인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PC방을 자주 이용하는 대학생 정 씨(23)는 “공부나 과제로 지쳐있을 때 리프레시하기에 피캉스만한 게 없다”며 “적은 비용으로 친구들과 함께 즐기며 놀거리가 많지 않은데, 게임도 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 수 있는 PC방은 정말 놀러가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캉스 문화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여행의 발견은 기존 여행업계 강자들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호텔만 따로 예약하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부킹닷컴, 호텔스컴바인 등 숙소 중개를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OTA(Online Travel Agency)가 등장하고, 여기에 야놀자, 여기어때 등 국내 신흥 OTA까지 합세하면서 패키지 상품 중심인 여행사들이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PC방 업계에선 인테리어 시공이나 지속적인 컴퓨터 사양 업그레이드가 어려운 개인 영세 사업자의 경우 오히려 고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자체 P&B 브랜드까지 만들어 신제품을 쏟아내는 체인PC방 업체를 따라가기 벅차고, 매장에 단순한 조리 시스템이 전부다보니 음식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식재료 유통기한 관리나 제조자의 보건증 관리 소홀 등의 사소한 문제도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캉스 문화’는 2030 세대 소확행의 확장판
○캉스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분석도 존재합니다. 양 교수는 “2030 세대가 바캉스 같은 놀이문화와 휴식, 쉼 같은 문화코드를 중요시하게 된 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본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밀레니얼 세대와 기성 세대가 마주하는 세상이 다르다고 봤습니다. 양 교수는 “경제성장은 멈춰있고 집값과 물가는 치솟고 있으며 취업난은 극심 해져가는 현 사회에서 2030 세대는 본인이 노력한 것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 대신 좌절부터 맛보게 된다”며 “N포 세대가 자연스럽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즐거운 무언가를 찾아보려는 일종의 ‘생존본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정 교수 역시 “○캉스 문화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확장”이라며 “소득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큰 비용을 쓰는 데 있어 부담을 느끼다 보니 오히려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낮은 가격대의 바캉스가 많아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피캉스를 자주 즐긴다는 직장인 이 씨(29)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고작 여기서 이렇게 한숨 돌리는 게 나한테 허용된 전부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답했습니다. 또 다른 직장인 정 씨(27세)는 “호캉스가 여행에 비해 드는 경비가 적은 것은 알지만 남들 다 즐기는 호캉스조차 가기 어려운 내 모습을 보면 자괴감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캉스’ 문화, 반짝 유행에 그칠까
이런 흐름은 계속될 수 있을까요? ‘트렌드’라는 말이 붙을 땐 짧은 수명이 내재된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캉스 문화 역시 슬라임 카페, 대왕 카스테라, 치즈 등갈비처럼 반짝하고 사라질 문화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정 교수는 “○캉스 문화가 특정 소비재에 대한 트렌드가 아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행의 이미지가 바뀌었다”며 “전반적인 소비 패턴이 변하는 큰 흐름 속에서 발생한 문화이기 때문에 10년 이상 정착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습니다. 알로프트 호텔 관계자는 호캉스가 앞으로 최소 4~5년은 지속될 트렌드로 전망할 것으로 내다봤고, 해피로PC방 관계자 역시 “앞으로도 간편하게 피캉스를 즐기려는 추세가 지속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예상대로라면 ○캉스 문화는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물 것 같은데요. 여러분이 최근 보낸, 혹은 곧 보낼 ○캉스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바쁜 생활 속 활력을 가져다주는 ‘리프레쉬’인가요, 숨통을 쥐는 일상에 마련한 잠깐의 ‘도피’인가요. 단순히 ○캉스를 즐기는 데서 나아가 그 의미를 들여다본다면 더 뜻깊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정민수 인턴기자 minsooje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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