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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학 중 절반이 기초과학 학과 없다

■주력산업 징비록을 쓰자 (하)

본지 180개 4년제 대학 조사

물리학·화학·수학 외면 심화

주력산업 연구의 뿌리 흔들려

박사학위 따도 교수 임용 안갯속

인재육성 선순환 시스템 실종





국내 4년제 대학 가운데 절반가량이 단 한 개의 기초과학 학과도 운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등 대학의 이공계 인재육성 시스템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특히 학문 연구의 근간인 대학에서 기초과학 분야 외면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며 인재 유출을 부채질하고 있어 기초학문 생태계 존립을 위한 근본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관련 시리즈 4면

22일 서울경제가 종로학원하늘교육과 공동 집계한 결과 전국 4년제 180개(신학대 및 특성화대 제외) 대학 중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 자연계 기초과학 학과가 단 하나라도 설치된 대학은 92개(51.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4차 산업혁명 도래 및 핵심소재 부문 강화를 위해 이과계 기초학문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지만 전국 4년제 대학의 절반가량인 88개(48.9%) 학교에는 자연계 기초과학 관련 학과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울권 32개 대학의 미설치율도 25%(8개)로 4개 학교 중 1개꼴이었고 수도권 및 지방권 148개 대학의 미설치율은 54.1%(80개)로 이미 절반을 넘었다.

해당 학과가 줄면 대학원생이 박사학위를 취득해도 교수나 강사로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인재육성을 위한 선순환 시스템이 끊기며 학문 생태계의 기반 자체를 위협할 수밖에 없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국내 주요 기업들도 석박사 인력을 외면해 우수 인재들이 더욱 국내 대학원 및 박사과정을 꺼리는 등 기초학문 생태계 자체가 존립 위기”라고 우려했다.

이처럼 기초연구가 흔들리면서 해당 연구인력을 품어야 할 산업이 자리 잡지 못해 애써 키운 인재가 해외로 떠나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국내에 남아 산업을 발전시켜야 할 인재들이 해외로 떠나고, 이 때문에 국내 산업이 더욱 황폐화하는 악순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내 대학 교수는 “세계를 무대로 돈을 벌 수 있는 산업이 돌아가야 우수 인력이 들어오는 선순환이 이뤄진다”며 “결국 글로벌 기업을 키워야 해당 산업이 커진다는 결론”이라고 말했다. /김희원·박한신기자 heewk@sedaily.com

이공계 대학원생 절반 “해외로”…인재 품을 시장도, 산업도 없다

[주력산업 징비록 쓰자]

<하>무너지는 산업 생태계



“한국에 인공지능(AI) 산업이 없으니 괜찮은 일자리가 없고 좋은 일자리가 없으니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죠.”

국내의 한 명문대에서 AI 알고리즘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 A씨의 얘기다. 국내 기업의 AI가 걸음마 수준이다 보니 취업을 한다 해도 보수와 근무환경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 A씨는 조건이 좋은 중국행을 선택했다. 선전에 위치한 업체는 A씨에게 2년 근무 이후 원하는 대학의 박사과정 진학을 지원하기로 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AI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국내 AI 연구인력들은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미국과 중국 등은 저만치 앞서 가며 이미 관련 생태계를 만들어냈지만 AI 산업 육성 시기가 늦은 한국은 우수 인재를 품을 수 있는 시장도, 산업도 없다. 오히려 규제의 그물에 걸리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곽승엽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전문연구원 제도 폐지 계획이 알려지자 서울대·고대·연대·KAIST·포스텍 대학원생 1,565명 가운데 49%가 해외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며 “주력산업의 위기는 인재육성의 위기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걸음마 수준 韓, 규제만 산적

美中은 생태계 만들며 인재 흡수

배터리도 인력이탈 경고 메시지

주력산업의 위기는 기업의 인재 생태계 붕괴에서 시작되고 있다. 인재육성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애써 키운 인재들을 산업 현장이 품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산업이 품지 못한 인재는 떠날 수밖에 없다. 지난 3일 전기차 배터리(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놓고 맞소송 중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정부부처로부터 인력유출 ‘워닝(warning·경고)’ 메시지를 받았다. 뒷북조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두 회사의 다툼이 기술 인력 유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인재 빼가기는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다”라며 “허술한 인재관리가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차질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매년 공개하는 두뇌유출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10점 만점에 4.00점으로 조사 대상 63개국 중 43위를 기록했다. 인재 유입보다 유출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인재유출은 지난 1996년 37개국 중 6위로 양호했던 반면 2014년 60개국 중 37위, 2016년 61개국 중 46위, 2017년 63개국 중 54위로 악화됐다. 삼성과 LG 등 대기업들이 해외 인재 유치에 혈안이 돼 있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인재들에게 한국은 매력적이지 않다. 외국계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엔지니어는 “한국 기업들은 관련 기반을 만들어놓고 이직을 제의하는 게 아니라 데려오려는 사람을 통해 기반을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 환경이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인재육성을 기업의 처우개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규제를 풀고 각종 인센티브와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규제 생태계도 인재 육성의 조건인 셈이다. 무엇보다 수도권 규제는 우수 연구인력 확보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수도권에는 공장 등의 시설을 지을 수 있는 면적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 허용(특별물량)이 없으면 새로 산업단지를 세울 수 없다. 국내의 한 연구원은 “생활 인프라 부족도 문제지만 지방근무의 가장 큰 단점은 산업 인프라가 부족해 부부가 모두 직장을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라며 “아내·자녀와 떨어져 생활하면서까지 지방 소재 일자리를 잡으려는 우수 인력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불 꺼진 연구소’를 양산하는 주 52시간 근로제도 규제가 인재육성을 가로막는 사례로 꼽힌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연구개발 분야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 완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관련 방안을 마련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두뇌유출지표 63개국 중 43위



“규제 풀고 R&D클러스터 절실”

우리 주력산업과 인재 시스템을 모래성으로 만든 또 다른 생태계는 기초연구 분야다. 세계 1위라고 자부했던 반도체의 소재 국산화 비율은 50.3%(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에 불과했다. 반도체 소재의 기반이 되는 기초화학 분야 연구가 일본에 뒤처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인재와 기술이 교류하는 클러스터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장부승 일본 간사이외국어대 교수는 “한국이 노벨상 등 기초연구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복수의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고 이곳에서 교수를 스스로 양성하고 교류하는 전통이 만들어질 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도쿄도·오사카부·아이치현(나고야) 등 3곳의 산업 중심에 3개의 연구 클러스터를 만든 것처럼 한국도 서울 클러스터 외에 부산·경남 등에 또 다른 인재와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리켄·RIKEN)와 같이 인재와 기술, 기업이 선순환되는 조직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내의 한 대학 연구원은 “뇌과학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슌이치 아마리 교수가 기계학습의 한 분야를 창조하다시피 하는 등 리켄은 최신 연구에서도 앞서 나가고 있다”며 “한국도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고 연구원에게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보장하는 리켄 같은 기초과학 연구소가 설립되면 인재와 연구가 융합되는 생태계 조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한신기자 hspark@sedaily.com

대학 10곳 중 7곳 물리학과 없어…고교서도 물리Ⅱ·화학Ⅱ 외면

■구멍난 과학교육

2315A04 네이처 연구논문 기여도 순위


절반에 가까운 국내 4년제 대학교에 물리학·화학·수학·생물학 등 자연계열 기초 학과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은 생태계 붕괴 위기에 처한 국내 기초과학계의 민낯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초과학 학문의 미설치율이 절반에 가깝고 국가 지원도 첨단 유행 학문에 집중되면서 기초과학 학문의 경쟁력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기초과학 관련 학과는 전국 4년제 대학 대부분이 개교 초기부터 개설해 운영해왔을 정도로 이과계 학문의 뿌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난 1990년대 후반 이후 특성화 및 융합 교육이 화두로 떠오르고 2000년대 이후 취업난 등이 겹치면서 급격히 세가 줄었다. 핵심 소재 확보는 물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 선도를 위해서도 기초과학 학문의 중요성이 재차 강조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대학 60% 수학·생물 등 미설치

융합교육·취업난 겹치면서 급감

정부 특정 사업 지원정책도 한몫

실제 관련 조사에서 학과별로는 물리 관련 학과가 서울 16개, 수도권·지방 31개 등 47개 대학에서만 운영돼 미설치율이 73.9%로 가장 높았다. 화학 관련 학과 개설 대학도 서울 22개, 지방 37개에 그치는 등 화학·수학·생물학과의 미설치 비율이 모두 60% 이상이었다. 특히 이런 수치는 전자바이오물리학과·나노전자물리학과 등 기초학문과 융합된 성격의 학과까지 모두 포함된 결과다.

이런 가운데 국내 기업들도 석박사 채용을 꺼리면서 인재들이 갈수록 국내 석박사 과정을 외면하며 대학의 연구 기반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2018년 논문 게재 등 연구 성과를 합산해 점수로 변환한 결과 한국은 1,304점에 그치며 2위인 중국(1만1,025.51)의 10분의1 수준에 그쳤다. 기관별로는 중국과학원(CAS)이 1위를 차지한 반면 한국의 서울대, KAIST는 각 68위, 73위에 불과했다.

특정 사업 위주로 지원하는 정부의 과학계 지원 정책도 재정에 목마른 대학들이 유행 학과 설치에만 열을 올리게 되며 기초학문의 시스템 붕괴에 사실상 일조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학 분야 지원 사업은 인공지능(AI) 대학원, 소프트웨어(SW) 중심 대학, 빅데이터, 블록체인, 스마트강판 등 최첨단 융합 학문에 집중돼 있다. 특정 사업에 선발돼 자금 지원을 받으려면 해당 학과 등을 개설해야 하고 확보된 자금은 해당 학과의 운영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 교육부 지원사업인 학술연구지원사업 등은 이공계와 인문계를 약 6대4 비율로 지원하지만 모든 단과대 전반이 대상이며 특정 분야에 대한 지원사업은 현 정부 들어 배제된 상태다.

“희망자 적어” 미운영 고교 허다

이과계 학문 접근 기회 사라져

과학교육의 부재는 비단 대학만의 일은 아니다. 일반고교에서 물리Ⅰ·Ⅱ 등 해당 학문의 기초 과정을 배울 수 있지만 희망자가 적거나 전공 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으로 심화 수업인 물리Ⅱ·화학Ⅱ 등은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물리Ⅱ를 배우지 않고 물리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사례가 빈번해 서울 상위권 대학에서도 이공계 대상 기초 보충수업은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지 오래고 일부 학생들은 과외까지 받고 있다. 선택과목을 다양화한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도 문·이과 장벽을 없앤다는 이유로 학과별 필수 이수과목에 대한 논의는 생략돼 서울 주요 대학들이 이공계열 지원 시 수학·과학에 필수 이수 과목을 지정하는 방안을 도출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새 교육과정에 따라 중하위권 대학으로 갈수록 이공계 진학 시 수학·과학의 심화 학습을 요구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돼 기초 과학학문에 접근할 기회가 차단되고 전반적인 학습 수준은 더욱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학생들이 이과계 학문에 호기심을 느낄 기회가 차단되고 있다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과학교육 및 과학지원 시스템 전반에 재검토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w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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