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등 정보기기만 해도 신제품을 내놓으려면 최소 3개월 이상 밤을 새우다시피 해야 합니다. 이런 마당에 주당 52시간 근로제는 족쇄가 될 수밖에 없어요. 특별 연장근로요? 그런 식으로 찔끔찔끔 규제를 풀려 하는 것 자체가 규제 완화에 대한 생각이 없다는 뜻 아닌가요.” 6일 한 가전업체 최고경영자(CEO)는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미증유의 악재 앞에서도 규제 완화에 소극적”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원자재 국산화에 한해 재량근로를 허용하는 식의 대책으로는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탄력근로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적폐 대상이었던 대기업이 미중 무역분쟁에 일본의 수출규제까지 겹치면서 위기극복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대기업 정책은 여전히 편향돼 있다. 지난해 하반기 경제가 휘청이며 대기업 정책의 궤도 수정이 이뤄지는 듯 보였지만 본질의 변화는 없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과의 만남 등이 소통이 아닌 쇼통으로 비칠까 걱정”이라며 “대기업이 공정경제와 소득주도 성장 등 현 정부 경제정책의 걸림돌이라는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부품·소재 국산화, 공급처 다변화가 발등의 불인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념지향적인 이분법적 정책, 시대착오적인인 반기업 정책의 틀을 깨야 한다는 말이다. 조장욱 서강대 명예교수는 “소득주도 성장, 공정경제, 포용적 성장 등 정부 기조가 요란한 인기영합 정책으로 귀결돼왔다”면서 “이제 기업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내실 있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게 절실하다”고 주문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도 “규제 개혁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토로했다.
전날 발표된 정부의 일본 수출규제 대책에 대해서도 기대보다 우려가 크다. 7년 동안 약 7조8,000억원을 들여 대규모 연구개발과 투자에 나사고 규제도 완화한다지만, 세부 내용을 보면 정책 기조 전환은 보이지 않는다. 규제에 찔끔 손을 댔을 뿐이다. 한 기업 CEO는 “정부가 반기업적 내용을 담고 있는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의 추진을 접고 노동개혁 등에도 나서야 한다”며 “손을 묶어놓고 손가락 하나를 풀어주는 대책이 아니라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관계자도 “‘가마우지 경제’ 구조를 깨고 국내 소재산업을 함께 키우는 ‘펠리컨 경제’로 가겠다는 말의 성찬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실제 기업을 뛰게 만들 과감한 규제개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박한신기자 hspark@sedaily.com
적폐로 몰며 만든 대기업 규제, 되레 소재 국산화 발목잡아
[동굴의 우상서 벗어나라] <1>이념 틀에 갇힌 대기업정책
(上) 규제혁파 없는 성장은 공염불
화학소재 수입신고 등록 대상
500개 → 7,000개로 14배 늘고
안전검사 명분에 공장도 세울뻔
정책 입안자로서 이분법 버리고
기업 주도 위기돌파환경 조성을
일본의 수출규제에 직격탄을 맞고 있는 국내 화학업종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화학물질을 수입할 때 소재별로 최대 47개나 되는 안전성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 개정으로 올해부터 이런 규제를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품목이 종전 500개에서 7,000개로 늘었다. 무려 14배나 급증했다.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일부 규제를 찔끔 풀기는 했지만 직접 제품 개발과 관련한 규제는 요지부동이다. 환경단체 등이 내세우는 이념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한다. 산업 현장에서는 일본의 수출규제 전부터 이런 규제가 소재 국산화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볼멘소리가 높았다. 화학업종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수입물질의 경우 해외에서 안정성 테스트를 받아야 해 비용 부담이 크고 시간도 빠듯하다”며 “소재 국산화를 외치면서도 (정부와 결이 맞닿은) 환경규제는 손도 못 대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불산 누출 등과 같은 안전사고가 터지면 정교한 해법 강구보다는 환경단체의 목소리에 매몰 돼 규제부터 만들고 보는 일 처리가 불러온 폐해는 전방위적이다. ‘안전성 테스트’라는 이름의 족쇄로 멀쩡히 돌아가는 공장도 세울 위기 직전까지 갔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급소를 찔린 삼성전자·SK하이닉스만 해도 내년부터 시행되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안에 따라 저압가스 배관검사를 무조건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임원은 “저압가스 배관검사가 의무화되면서 안전성 진단을 받아야 한다”며 “공정이 모두 연결돼 있어 검사를 받으려면 결국 공장을 멈춰야 했는데 고시 개정으로 다행히 공장 가동 중지만은 막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거미줄 같은 화학물질 관련 규제는 공정 기밀마저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한 경제단체의 임원은 “만약 올 정기국회에서 화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화학물질을 유통시킬 때 물질별로 이름표 붙이듯 라벨을 붙여야 한다”며 “기업의 공정 레시피가 오픈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화학물질을 관리하기 위해 유통 과정을 일일이 추적하겠다는 행정 편의적 발상이 기밀 유출로 귀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화학물질 성분 공개는 없다”며 “과도한 걱정”이라는 입장이다.
대기업을 적폐로 몰며 만들었던 각종 규제와 입법은 결국 부메랑이 돼 기업의 발목을 단단히 묶어 버렸다. 가뜩이나 미중 무역분쟁, 일본의 수출규제로 기업이 핀치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당장 미국이 오는 9월부터 추가로 3,000억달러에 달하는 중국 수출품에 10% 관세를 매기면서 사실상 미국으로 들어가는 중국 제품 전체에 관세라는 혹이 붙는다. 이대로면 ‘메이드인 차이나’의 경쟁력하락→중국으로 중간재 수출 감소→수출 기업의 실적 악화→경기 침체 심화라는 악순환이 불가피하다. 설상가상 일본의 수출규제로 글로벌 밸류 체인에 심각한 균열마저 났다. 소재 국산화, 공급선 다변화 등이 약방의 감초처럼 해법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단기 처방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긍정적인 대목은 쇼크에 가까운 이런 외부 충격이 이념 지향의 정부에 각성을 유발하고 있는 점이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정부가 정책 입안자로서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며 “기업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재계에서는 내년 총선과 맞물려 우후죽순 등장한 반기업 법안에서 기업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각종 법안을 솎아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20대 국회에 제출돼 계류 중인 법안 2만여건 가운데 규제법안은 전체의 15%를 웃도는 3,200건(규제정보 포털 기준)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을 담은 상법개정안의 경우 안정적 성장을 위한 기업의 경영권 방어 보장, 지배구조의 자율선택을 통한 경쟁력 제고를 큰 축으로 하는 세계적 추세를 거스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전속 고발권이 폐지되면서 고소·고발이 남발될 우려가 크다. 이런 법들은 올 정기국회에서 어영부영하는 새 통과될 가능성이 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현재 발생하고 있는 복합위기를 맞아 기업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만 맹목적인 반기업 정서도 여전하다”며 “만약 이런 법안이 국회 관문을 넘게 되면 기업들이 위기 돌파에 전력을 쏟기 어렵다”고 말했다.
소재 국산화를 앞당기기 위한 정책적 배려도 절실하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최근 “국내에서 1부터 100까지 다 개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인수합병(M&A)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임원은 “지주회사에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를 허용하는 등의 발상 전환도 검토해야 한다”며 “지배구조라는 도그마에 갇혀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짚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