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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두 명의 워싱턴

리처드 코언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인종주의 유산 지금도 곳곳 널려
노예·노예주로 갈렸던 두 워싱턴
모두 미국인이란 역사인식 필요

  • 2019-08-26 17:05:22
  • 사외칼럼
[해외칼럼] 두 명의 워싱턴

본 칼럼은 워싱턴으로 불리는 남자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본뜬 노예 해리 워싱턴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한 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추포됐다. 해리는 마운트버넌에서 주인의 마필을 관리했다. 후일 두 번째 탈출에 성공한 그는 영국군에 가담해 주인이 이끄는 반란군 진압에 참여했다.

두 명의 워싱턴은 말 그대로 딜레마다. 한 명은 개인의 해방을, 다른 한 명은 국가의 독립을 추구했다.

필자는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인 질 르포어의 명저 ‘이것이 진실이다: 합중국의 역사(These Truths: A History of United States)’를 통해 해리 워싱턴에 관해 알게 됐다. 책의 앞부분은 노예의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거듭된 반란과 처벌, 교수형과 화형, 참수의 기록이 전반부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당시 노예제는 그 이전과 달리 유별난 게 아니었다. 일부 남부 주의 경우 노예제는 웨스트버지니아에 석탄이, 텍사스에 석유가 그랬듯 경제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는 노예제 없이는 상상조차 불가능했을 정도다.

미국의 백인들에게 인종주의와 노예제는 우리 문화의 수면 바로 아래 잠복한 대단히 중요한 유산이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인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에 묘사된 노예제에 대한 미화와 찬양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동명의 영화에서 여주인공 오하라의 충직한 하녀 프리시 역을 맡은 흑인 여배우 버터플라이 매퀸은 “어머 스칼릿 아가씨, 난 출산에 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답니다”라며 한바탕 수선을 피운다 (매퀸은 후일 64세의 나이에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0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신세대 학자들은 노예제와 인종주의의 진정한 폐단을 똑바로 응시했다. 철저히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 같은 역사를 콜게이트대의 로버트 갈런드는 ‘역사의 반대편(The Other Side of History)’이라 부른다.

이처럼 우리는 최근 들어 귀중한 공화국의 형성과정과 거대한 부의 생산에 노예제가 담당했던 막중한 역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리먼브러더스·조지타운대 등) 상당수의 미국 기업과 기관은 노예제도 덕분에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고 목화와 설탕 산업은 온전히 노예들의 노동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르포어가 쓴 책은 ‘역사의 반대편’이라는 범주에 맞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과 기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노예들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이다.

미국 독립혁명 동안 수십명의 노예가 워싱턴의 마운트버넌과 제퍼슨의 몬티첼로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영국군 진영으로 달아나거나 북부로 도주했다. 전쟁 막판에 30명의 노예들이 영국군이 포진한 전선을 향해 도주했는데 그들 가운데 15명이 도중에 사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하버에서는 영국군 롱보트에 승선하려는 노예들이 필사적으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르포어에 따르면 “이들은 붐비는 보트의 난간을 붙잡고 배에 올라타려 했다.” “그들이 물러서지 않자 영국군은 배의 난간을 붙잡은 노예들의 손가락을 절단했다.”

필자는 역사 마니아다. 정규학습 진도에 앞서 역사 교과서를 통째로 읽곤 했던 필자는 12세 이전에 이미 재건시대를 무대로 한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 ‘자유의 길(Freedom Road)’을 독파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묘사된 노예들의 행복한 모습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1950년대 초등학교 시절 필자는 대부분의 노예가 실제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배웠다.

미국 독립혁명은 그 자체로 노예제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만약 만인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면 어떻게 그중 일부가 노예가 될 수 있었을까. 제퍼슨과 워싱턴 등 일부 인사들은 죽을 때까지 노예들을 소유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용납할 수 없는 위선을 시인하고 노예들을 풀어줬다. 퀘이커 교도들 역시 대담하게 노예제도를 비난했다. 펜실베이니아의 발명가이자 현자로 (한때 노예들을 소유했던) 벤 프랭클린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됐다.

우리와 역사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해온 모든 것들 그대로의 역사를 시인해야 한다.

역사의 표면에서 불과 한 삽 아래에 노예제가 놓여 있고 지금도 도처에 인종주의가 팽배한 상황임을 인정해야 한다. 마치 곰팡이처럼 인종주의는 역사의 지표면에 그대로 들러붙어 있다.

우리는 ‘~이자’ 혹은 ‘~이면서’라는 뜻의 편리한 연결 단어인 ‘and’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노예 소유주이자 폐지론자였고, 인간을 소유물로 사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악했으나 동시에 대단히 선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안의 지극한 ‘선’이 ‘악’을 보상해야 한다.

필자는 보상이라는 개념에 반대하지만 막대한 빚을 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돈을 빚진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지식을 빚지고 있으며, 우리의 현재 모습은 노예제와 두 명의 워싱턴에 의해 틀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한 명은 노예였고 다른 한 명은 노예주였으나 그들 모두 미국인이었다는 역사 인식을 빚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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