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9월6일 밤 9시15분, 충남 청양군 구봉금광에 사고로 매몰된 광부 김창선(당시 35세)이 살아서 돌아왔다. 붕괴 사고로 지하 125m에 묻힌 지 15일 9시간 만이다. 전 국민들은 부모·형제가 돌아온 것처럼 그를 반겼다. 붕괴 사고 발생(8월22일) 이후 현장에 몰린 신문·방송 기자 70여명이 매일같이 보도해 국민적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인간 승리’의 감동을 안겨 준 밤이 지나자 정부는 그를 군용 헬기로 후송, 메디컬센터(국립의료원 전신)에 입원시켰다.
세계 언론도 매몰 광부 생존 세계신기록을 세운 김씨의 소식을 다뤘다. 어둠 속 배고픔과 갈증, 고독과 절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짓눌러 1주일 이내에 사망하는 게 보통인데 김씨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강한 의지와 체력, 현명함과 경험이 그를 살렸다. 62㎏(키 175㎝)이던 몸무게가 45㎏으로 급감한 것 외에는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다. 여름이지만 섭씨 14도인 지하에서 견딜 만큼 체력도 남달랐다. 도시락 하나를 3일간 아껴 먹은 뒤 간간이 떨어지는 지하수로 목을 축이면서도 체내 염분 저하를 의식해 최소한만 마셨다.
결정적인 것은 경험. 수직 갱도가 흔들거리자 대피소로 몸을 피하고 해병대 복무 시절 통신병 경험을 살려 전화선을 이었다. 김씨는 되살린 유선망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도 이었다. 국민들은 김씨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박수를 치고 간절하게 빌었다. 부작용도 속속 나타났다. 취재 경쟁을 넘어 뻥튀기 기사와 작문이 활개치는 가운데 구조 하루 전인 5일 희대의 촌극이 일어났다. 김씨의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전교생이 환호성을 지르고 지역 유지들은 청양농고 취주악대를 앞세워 축하행진을 펼쳤다.
한 방송국이 ‘곧 나온다’는 단정 아래 ‘구조 성공’이라는 자막 뉴스와 미리 준비한 30분짜리 특집 방송을 송출했기 때문이다. 어떤 석간신문은 구조된 김씨가 ‘고맙소’를 연발했다는 내용을 1면 머리기사에 실었다. 김씨가 하루 반나절 뒤 구출되기까지 언론은 작문 경쟁을 펼쳤다. 정권은 이를 즐겼다. 여당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6·8총선 부정 규명 정국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투표율 100%가 넘는 지역이 나오고 관권 선거, 매수, 투표 방해 등이 총동원된 6·8총선에 대한 관심이 김씨 관련 뉴스로 쏙 들어갔다. 사고가 낡은 갱목을 사용한 기업의 안전불감증 탓이라는 분석도 없이 미담과 오보로 점철한 언론은 옛 얘기일 뿐일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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