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일본 동북부 센다이번(仙台藩). 하세쿠라 쓰네나가(당시 48세·사진)가 6년 11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행선지는 스페인령 멕시코와 스페인, 그리고 로마. 통상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 2년 뒤에는 기독교 박해로 사망했으나 하세쿠라의 모험과 항해는 개항기에 일본 근대화를 위한 자산으로 되살아났다. 일본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국가가 서구로 보낸 최초의 공식 사절이지만 정작 당시 일본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선도가 떨어졌다. 하세쿠라보다 30년 전에 ‘덴쇼소년사절단’이 유럽을 8년 여정으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일본 포교 성과를 알리고 싶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기리스탄(기독교도) 다이묘(영주)들이 보낸 13명 규모의 소년사절단은 스페인과 로마에서 세계 지도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들고 왔다. 둘째는 박해 조짐. 도쿠가와 바쿠후의 쇼군(사실상의 국왕)이 선교사를 죽이거나 추방하는 박해가 시작돼 하세쿠라는 소리 소문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제국과의 통상이라는 파견 목표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하세쿠라가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할 즈음에는 로마도 일본의 움직임을 알고 조심하던 무렵이어서 협상이 성사되기 어려웠다. 하세쿠라의 외교 실패에도 쇼군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바쿠후가 아니라 지역 다이묘가 대외적으로 ‘왕’이라는 이름을 쓰며 교섭을 맡았기 때문이다. 쇼군이 유력 다이묘를 내세워 통상을 추진했던 것은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스페인과 교황청이 하세쿠라를 환대했던 데도 일본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스페인이 하세쿠라 사절단에서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 길이 55m에 배수량 500톤급 갤리언선으로 유럽 기준으로 대형인 이 선박은 이름만 스페인어일 뿐 일본에서 건조된 배였다. 중앙정부인 바쿠후가 갤리언선 2척을 건조한 데 이어 지방정부가 바쿠후의 지원으로 만든 세 번째 서양 선박이었다. 센다이번은 선교사와 난파선 선원의 지도 아래 바쿠후가 보내준 대장장이 700명, 조선공 800명, 목수 3,000명을 투입해 45일 만에 이 배를 만들어냈다.
훗날 일본이 재빨리 근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던 데도 신문물에 대한 남다른 호기심과 자신감·끈기가 깔려 있다. 비슷한 시기 조선은 표류 외국 선원들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명의 멸망 뒤에는 ‘이제 우리가 중화’라는 착각에 빠진 채 쇠락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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