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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동방의 등불'은 詩가 아닌 메모였다

■ 학교서 배우지 않은 문학이야기

-우리 가슴속의 가짜 타고르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

타고르가 건네준 6행 메시지

시인 주요한이 4행으로 번역

훗날 엉뚱한 시 덧붙어 짜깁기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대목

타고르 목소리 아닌 희대 사기극

'동방의 등불'은 원본없는 가짜번역

조선인을 위해 처음 보내온 시

'쫓긴 이의 노래'는 완전히 잊혀져

최남선이 지난 1916년에 받은 사진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친필 사인. 잡지 ‘청춘’ 권두화보에 실렸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조선인을 위로하는 시를 보내온다면 어땠을까. 식민지 출신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직접 조선을 찾아온다면 어땠을까. 첫 번째 일은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지난 1916년에 실제로 일어났다. 두 번째 일은 3·1운동 10주년을 맞이한 1929년에 추진됐으니 성사될 리 없었다. 타고르가 처음 보내온 시는 지금도 남아 있지만 우리 기억 속에서는 말끔히 잊혔다. 두 번째 경우는 시를 보내지 않았지만 모두의 가슴속에 간직되고 오래도록 유전됐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일본에 유학중인 진학문(뒷줄 왼쪽 첫번째)이 1916년 일본 요코하마 별장에서 타고르(앞줄 가운데)와 찍은 기념사진.


타고르가 1917년 조선을 위해 보내온 시 ‘쫓긴 이의 노래’.


타고르가 처음 일본을 방문한 것은 1916년이다. 때마침 도쿄에 머물고 있던 최남선은 제국대학 강연회에서 타고르를 만났고 한 달 뒤에는 유학생 진학문이 요코하마에서 타고르와 두 차례 면담했다. 얼마 후 타고르는 자신의 사진과 친필 사인, 그리고 거듭 약속했던바 조선인을 위한 시를 잊지 않고 보내왔다. 이듬해 간신히 소개된 ‘쫓긴 이의 노래’가 바로 그 시다.

‘쫓긴 이의 노래’ 원제는 ‘The Song of the Defeated’다. 이 시는 타고르가 새로 지은 것이 아닐뿐더러 식민지 망국민을 노래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단통치 시기의 독자들에게 패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너무나 분명하니 타고르가 고심해 골랐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6행의 영문 원시가 8행으로 잘못 소개됐고 한국어로는 무려 23행으로 번역됐다. 교묘한 오역이라 해야 할까. 그나마 오늘날에는 이 시가 완전히 잊히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1929년 3월 타고르가 건네준 메시지. 시가 아니며 ‘동방의 등불’이라는 제목도 없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은 ‘동방의 등불’이다. 왜냐하면 ‘동방의 등불’의 원시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고르가 네 번째 일본 방문을 마치고 캐나다로 떠나면서 건네준 작은 메모지가 전부다. 시인 주요한이 편집장으로 있던 동아일보는 타고르가 조선에 부탁했다는 기념비적인 문장을 엄연히 메시지라 일컬으며 ‘빛나던 아세아 등촉 켜지는 날엔 동방의 빛’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주요한이 번역해서 동아일보에 공개한 타고르의 메시지.




신문에 공개된 메모지에서는 6행의 영문 친필과 사인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주씨는 이 메시지를 음절 수 잘 맞춘 4행으로 번역했다. 누구도 이를 두고 시라고 일컬은 적이 없고 어디에도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10여행이나 되는 엉뚱한 시가 덧붙어 짜깁기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예찬하는 명시로 둔갑했다. 특히 우리를 격동하게 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운운하는 대목은 도저히 타고르의 목소리일 리 없으니 희대의 사기극이다. 버젓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한 ‘동방의 등불’은 한마디로 원본 없이 존재해 온 가짜 번역이다.

두 달 뒤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른 타고르는 다시 한 번 조선인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전해 왔다. 건강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해 유감이라는 딱 두 문장이었다. 이때 비로소 타고르는 조선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향적으로 내비쳤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타고르는 자신의 조국 인도와 같은 처지에 놓인 식민지 조선에 오고 싶지 않았거나 혹은 오려고 해도 올 수 없었다. 일본을 다섯 차례 방문하는 사이 타고르는 중국에 한 차례 다녀가기도 했다.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올라가며 백발의 시인은 냉대와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타고르가 조선에 찾아왔더라도 논란이 일어났을까. 혹시 영국 기사 작위를 받은 적이 있다든가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가 말썽이 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오늘날까지 우리 가슴속에 ‘동방의 등불’이 타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박진영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타고르를 세계적인 시성으로 만든 것은 번역이었다. 타고르의 모어는 벵골어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영국에서 유학한 타고르는 자신의 시집을 손수 영어로 번역해 출판한 덕분에 노벨문학상에 더 빨리 다가설 수 있었다. 번역이 아니었다면 타고르의 시는 식민 종주국 영국에도, 1차대전에 뛰어든 일본에도, 동아시아 변방의 식민지 조선에도 가닿을 수 없었다.

타고르가 한국인의 가슴속 깊이 파고든 것도 오직 번역의 힘이었다. 한 번은 오역이요, 또 한 번은 날조였다. 원작이 무엇이든 원본이 있든 말든 타고르가 식민지 망국민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심어 주고 미래를 꿈꾸게 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번역이라는 상상력의 마법은 원작보다 빼어난 위조를, 원본 없는 모방을 역사적 진실로 만들어줬다.

번역은 남의 감정과 사상을 자기 목소리로 만드는 방법이다. 번역은 한 나라·한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공유하고 연대하고 확장하는 실천의 무기가 된다. 세계사의 주변부에서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 저항과 혁명으로 이어진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한국의 타고르가 탄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은 인도에도 영국에도 일본에도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의 ‘쫓긴 이의 노래’요, 우리의 ‘동방의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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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기자 여론독자부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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