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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스톡홀름 피바다

1520년 근대 스웨덴 출발점

‘스톡홀름 피바다’를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1520년 11월8일 스톡홀름. 나흘 전 스웨덴 국왕 자리에 오른 크리스티안 2세의 즉위 축하연 이틀째 저녁 무렵에 덴마크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덴마크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던 스웨덴 귀족들이 모인 연회장이 아수라장으로 바뀌고 저항하는 귀족들은 창칼에 꿰뚫렸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했던 재판이 열리고 반(反)덴마크 스웨덴 독립전쟁에 섰던 귀족들은 ‘이단’이라고 지목받아 줄줄이 목숨을 잃었다. 사흘간 적게 잡아도 82명의 귀족이 처형당한 ‘스톡홀름 피바다(Stockholm Bloodbath)’ 사건은 스웨덴의 정체성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의 살아남은 독립파들은 반덴마크의 기치를 더욱 높게 들고 1523년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 1397년 이래 유지돼온 칼마르 동맹 체제가 깨지고 스웨덴은 북구의 강자로 거듭났다.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사실상 덴마크의 지배를 받던 칼마르 동맹에 맞서기 시작한 것은 1512년부터. 덴마크가 두 차례 보낸 진압군을 물리쳤던 독립군은 1520년 1월 보게순드 전투에서 무너졌다. 프랑스와 독일·스코틀랜드 용병이 대거 포함된 세 번째 진압군에 대패한 독립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자유선거를 통해 총독으로 뽑힌 뒤 독립군을 이끌었던 스텐 스투레도 죽었다.



스웨덴 귀족회의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반란 책임자에 대한 사면(赦免)을 약속하면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의하고 덴마크도 이를 수용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덴마크가 왜 약속을 어겼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적지 않다. 확실한 것은 친(親)덴마크 진영에 섰던 대주교 집안이 귀족들의 처형을 종용했다는 점이다. 다시금 결사 항전으로 돌아선 스웨덴은 결국 덴마크를 3년 만에 몰아냈다. 스웨덴 국왕에 오른 구스타브 바사는 도망친 대주교를 민족 반역자로 지목하고 교황청에 교체를 요구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스웨덴은 이때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신교 이념 아래 ‘근대전의 아버지’로 병종 간 유기적 운용의 모범을 보였던 구스타브 아돌프 왕의 지휘 아래 스웨덴군은 30년 종교전쟁의 향방을 결정했다. 스웨덴이 아니었다면 신앙 선택의 자유는 더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오랜 원한에도 스웨덴과 덴마크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 스웨덴이 덴마크를 지배한 적도 있어 감정이 해소됐기 때문이라고. 모범적인 강소국가 스웨덴은 과거의 모든 것을 역사 속에 묻었지만 단 한 명의 이름만큼은 저주 속에 기억한다. 기득권 때문에 종교의 이름으로 동족을 모함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대주교는 반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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