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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90년 리콴유 2선 후퇴

깨끗한 권력으로 고도성장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위키피디아




1990년 11월28일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가 스스로 물러났다. 1959년 영국 자치식민지의 총리로 취임한 지 31년 만이다. 20세기 장기 집권자 가운데 제 발로 내려오기는 사상 처음. 부하의 총에 맞거나 국민에게 쫓겨나지 않으면 자연사할 때까지 권좌를 누리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랐다. 치적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났다. 불안한 치안과 싸구려 홍등가였던 싱가포르는 보석으로 거듭났다. ‘고문 장관’이라는 감투로 사실상 상왕(上王) 자리까지 내려놓으며 완전 은퇴한 2011년, 싱가포르와 이웃 나라들과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리콴유가 총리로 재임하던 31년, 고문 장관 기간까지 포함하면 52년 동안 싱가포르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꾸준하고 빠르게 내달렸다. 2004년 총리직을 계승한 그의 장남 리셴룽 체제에서도 순항은 이어지고 있다. 2018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6만5,628달러. 구매력 기준으로는 10만달러가 넘는다. 한국의 두 배 이상이며 관광도시인 마카오를 빼면 아시아 1위다. 1970년대 초중반만 해도 한국과 비슷하던 싱가포르는 어떻게 기적을 이뤘을까. 온갖 고난을 헤치고 다진 리더십 덕분이다.



싱가포르의 정치 환경이 남국의 따뜻한 햇볕처럼 좋았을까. 정반대다. 청장년기 리콴유는 국가(國歌)가 네 번이나 바뀌는 경험을 했다. 영국과 일본을 거쳐 말레이시아 연방, 독립국으로 변모하는 동안 정치적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엇갈렸다. 민족 구성도 다수 중국계에 말레이계와 인도계가 뒤엉켰다. 중국어와 영어, 말레이어와 타밀어를 공용어로 쓰고 종교도 유교와 불교·기독교·이슬람교·힌두교가 공존했으니 구심점을 찾기 힘들었다. 집권 초기에는 영국에서 자치권을 얻었으나 말레이시아로부터 반강제로 분리되며 안보 위협에 떨었다.

리콴유의 선택은 실용주의와 반(反)부패. 공무원 급여를 대폭 올려 부정 소지를 없앴다. 부패를 감시하는 탐오조사국(貪汚調査局·CPIB)은 검경을 동원해 고위공직자들의 부정을 막았다. 한화 2,400만원 규모의 뇌물 수뢰 혐의를 받은 리콴유의 친구이자 현직 장관이 자살한 적도 있다. 화합을 위해 그는 종교까지 눌렀다. 말레이계(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전도를 ‘무감각한 복음’이라며 성서 전달마저 막았다. 2015년 세상을 등진 리콴유가 청년기에 만든 집권 인민행동당(PAP)은 아직도 절대 의석을 차지한다. 개발 독재라는 비판에도 정부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고 성장도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깨끗한 권력이 진정 강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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