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3년 3월 학원을 마치고 귀가하던 여학생이 뒤따라온 정체 모를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상의에서 체액을 채취해 유전자(DNA) 감정을 의뢰했지만 신원이 특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16년이 흐른 올해 6월 경찰은 성폭력 사건으로 구속수감된 피의자 A씨의 DNA를 채취해 데이터베이스(DB)에 수록하던 중 깜짝 놀랐다. A씨의 DNA가 16년 전 여학생 성폭행 사건 용의자의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만약 강력사건 피의자의 DNA를 채취하도록 한 법이 없었다면 16년 전 사건은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20여일 뒤면 이 같은 가정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범죄자 DNA 채취법안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올해 말이면 효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이달 안에 국회에서 대체입법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당장 내년 1월부터 주요 미제 사건 수사의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1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1월부터 10월까지 구속피의자의 DNA 정보 수록 건수는 총 4,279명으로 집계됐다. 절도·강도(988명)와 폭력(968명) 범죄 피의자가 가장 많았고 마약(750명)과 성폭력(432명), 강간·추행(375명)이 그 뒤를 이었다. 마약 사건의 경우 이미 지난해 전체 마약사범 DNA 등록 건수(701명)를 넘어섰다. 법무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교정시설에 수감 중인 수형인의 올해 DNA 등록 건수는 10월 말 기준 1만4,875명에 달한다.
감식기술의 발달로 범죄현장에서 증거물로 수집되는 DNA 건수도 매년 늘고 있는 추세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범죄현장에서 등록된 DNA 건수는 1만723건으로 지난해 전체(1만1,306건)에 육박하고 있다. 특히 강간·추행(1,070건)이나 성폭력(250건), 마약(183건) 등 주요 강력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DNA 건수는 이미 지난해 수준을 넘어섰다.
범죄현장에서 수집한 DNA 증거물은 강력 사건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범죄현장에서 채취한 용의자의 DNA가 경찰 DB에 등록된 범죄자의 DNA와 일치하는 경우는 연평균 1,000건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DNA 대조를 통해 매년 1,000여명의 강력 사건 용의자가 실체를 드러내는 셈이다. 영원한 미제 사건으로 묻힐 뻔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이춘재로 밝혀진 것도 범죄자 DNA 정보를 모아 관리해온 DB 시스템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채취대상자의 의견진술 기회나 불복절차가 없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범죄자의 DNA를 채취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은 올해 말 효력을 다하게 됐다. 입법 공백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는 송기헌·권미혁·김병기 민주당 의원 등이 채취대상자에게 의견진술의 기회를 주고 영장발부에 대한 불복절차를 규정한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했지만 아직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연내 입법이 불발될 경우 영장발부가 불가능해지면서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DNA 채취를 할 수 없게 된다. 김현수 경찰청 과학수사기법계장은 “우리뿐 아니라 해외 선진국에서도 범죄자 DNA를 채취해 활용하는 수사가 활발히 이뤄진다”며 “특히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운 장기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DNA 채취법안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사위는 지난달 21일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대체 법안을 논의했지만 세부 문구를 조율하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갔다. 법사위 여당 간사이자 관련 법안을 발의한 송 의원은 이날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여러 현안을 둘러싼 여야 간 입장차로 아직 법사위 일정을 잡지 못한 상태”라며 “대체 법안을 연내 처리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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