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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창조와 파괴의 천재, 노년엔 쇠퇴의 길을 걷다

■예술가, 그 빛과 그림자-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이연식 미술사가

자신이 만든 스타일에 안주 않고

한계 모르는 과단성·에너지 표출

사물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충격 줘

기존 틀 깨면서도 예술로 승화시켜

1945년이후 거장 작품 재해석 그쳐

예술적 자산 소진후 트랙서 물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이미지들을 창조해야 한다, 사람들이 거품을 물도록.” (파블로 피카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해 말할 때 꼭 딸려 나오는 이름이 피카소(1881~1973)다. ‘피카소 그림 같다’라는 말 한마디로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린 예술가는 피카소 말고도 여럿 있다. 칸딘스키·폴록·로스코 같은 예술가들의 그림은 아예 추상이라서 더 알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유독 피카소가 파격적이고 난해한 예술의 대표가 된 건 무엇 때문일까. 피카소라는 예술가의 세계가 갖는 유일무이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년




처음에 피카소는 대단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는 점이 곧잘 언급되지만, 이는 뒷날의 성공이 거꾸로 과거에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기이할 정도로 묘사력이 좋은 아이들은, 많지는 않아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다. 피카소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예술 활동의 마디마다 그가 보여줬던 결단이다. 피카소는 자신이 만들어낸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 스타일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에 스타일을 확 바꿔버렸다.

라이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비교해보면 피카소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마티스는 야수주의를 이끌면서 색채의 강렬한 힘을 드러냈다. 그의 작품은 당대 회화의 문법에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절충적인 흐름을 보였다. 반면 피카소는 매 시기 한계를 모르는 과단성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은 상상 가능한 한에서 가장 끔찍한 그림이었다. 잔혹한 장면이나 흉측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피카소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충격을 줬다.

1962년의 피카소


문제는 그다음이다. 피카소와 마티스 모두 중견 예술가가 되면서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펼칠 동력을 필요로 했는데, 마티스는 남부 프랑스와 지중해의 풍광, 오리엔탈리즘의 취미에서 그걸 찾았고, 피카소는 스스로의 어둡고 광포한 내면을 탐구하면서 세계를 확장시켰다. 한편 피카소는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에 걸쳐 고전적인 회화 문법으로 돌아갔다. 좋게 말해 ‘고전주의’ 시기였다. 그 뒤로는 초기의 스타일을 혼합해 구사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미술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요컨대 피카소는 꽤 일찍부터 절충적이었다. 피카소의 20대를 가리키는 ‘청색 시대’와 ‘장밋빛 시대’ 또한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고 청년기 특유의 우울함을 담은 절충적인 시기라고나 해야 마땅하다.

피카소의 목표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것 중에서 피카소가 맨 처음 만들어낸 게 뭔지 따지자면 답이 궁해진다. 피카소는 호적수였던 마티스, 동료였던 브라크의 스타일을 보면서 조형적인 파격과 혁신이야말로 미술을 새롭게 하는 동력임을 간파했고,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과감한 시도를 거듭했다. 피카소가 시작한 것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손댄 거의 모든 것을 가장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피카소는 예술의 파괴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는 어느 누구보다 서양미술사의 전통을 존중하고 신봉했다. 이 점에서 피카소는 뒤샹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뒤샹은 예술의 전통적인 관념을 전복시키며 벗어나려 했다. 예술과 사물의 경계를 흔들면서 사물의 세계로 탈주



이연식 미술사가


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광포하게 날뛰면서도 예술의 영역 속에 존재했고, 몇몇 사물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예술의 영역을 조금은 더 풍요롭게 만들었으며 예술과 사물의 경계를 고수했다.

피카소는 의외로 매우 전략적이었다. 미술사를 읽다 보면 ‘아비뇽의 여인들’은 완성된 직후 세상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실은 피카소는 이 그림을 주변의 몇몇 예술가에게만 보였고, 이들이 너무도 끔찍스러워하자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비뇽의 여인들’은 1907년에 완성됐지만 대중에게 공개된 건 1916년의 일이다. 이미 피카소가 입지를 굳힌 뒤였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응에 매우 민감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용의주도하고 유연하고 종종 파렴치했다.

존 버거는 1965년의 저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에서 1945년 이후 피카소의 작품은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쇠퇴했다고 질타했다.

피카소가 노년과 말년에 내놓은 작품들은 보기에 난감하다. 우리가 한 예술가의 특정 시기가 아니라 전 시기를 평가해 그에게 ‘천재’라고 이름 붙여왔음을 고려하면 피카소의 쇠퇴를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무렵 혈기 방장했던 비평가 버거는 피카소가 쇠퇴했다고,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아이처럼 소리친 것이다. 피카소는 스스로에게서 주제를 찾을 수 없게 되면서 푸생·쿠르베·마네 같은 옛 거장들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그런데 옛 작품들의 정수를 관통했다고는 도저히 평가하기 어려운 작업들이었다. 그저 피카소가 나이 들어서도 정력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피카소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으며 작품 가격은 치솟았다. 하지만 그의 예술은 고장 난 바퀴처럼 헛돌기만 했다.

성장과 발전과 변화를 부정하는 천재의 신화는 피카소에게 영예를 가져다줬지만 동시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경주를 시작하게 했다. 그의 성공은 내적 자산이 시대와 상황과 맥락과 우연과 만나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과 맥락은 달라지며 예술가에게 변화와 발전을 요구한다. 예술가는 버거운 경주를 계속해야 하며 어느 시점까지는 따라갈 수 있지만 점점 힘에 부친다. 마침내 예술적 자산을 소진하고 트랙에서 물러난다. 모든 예술가가 성공할 수는 없지만 모든 예술가는 결국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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