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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에서 투자처로..아파트, 계층상승 '상징'이 되다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20> 아파트

아파트 단지들이 늘어선 서울 서초구 일대 모습 /연합뉴스




고등학생 시절 우연한 기회에 ‘키 작은 보헤미안’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내가 직접 샀던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명절날 큰집에 갔다가 사촌 누나의 책꽂이에서 발견하지 않았나 싶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시카고 근교의 ‘헨리 호너 단지’라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사는 흑인 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저널리스트가 몇 해에 걸친 밀착 취재 끝에 써낸 이 ‘르포 소설’은 근 삼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아파트 단지에서 마약 밀매가 성행하고 총격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시카고 주택당국 관계자들이 단지 지하실을 열어 봤을 때의 장면은 뇌리에 선명하다. 물웅덩이 사이로 썩어가는 가전제품들과 죽은 동물의 사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악취는 코를 찔렀다. 이 장면은 호너 단지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1970년대 중반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한 지방 공업 도시의 사택으로 제공되는 아파트 단지였다. 그곳에서 기억나지 않는 유년 시절을 보낸 후 서울로 올라와 몇 군데의 아파트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6년 ‘영동AID차관아파트’에 입주하게 됐다. 5층짜리 건물이 30동으로 총 1,500여가구가 살던 꽤 큰 아파트 단지였다. 1960년대에 강북 지역에 몇 군데 아파트가 건설되기는 했지만, 대단지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였다. 우리 가족은 그 흐름에 맞춰 삼성동에 자리 잡았다. 이후 미국에서 지낼 때 잠시 단독주택 생활을 해본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옮겨 다녔다. 이를테면 나는 한국에서 평생을 아파트 생활만 해온 첫 세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강남 개발 맞물려 우후죽순

인구밀도 해결책이라지만 주거문제 여전

갈수록 높아져 재산 증식 수단으로 ‘숭상’

다주택자-세입자 늘어나며 양극화 지속

주거공간 상상력 넓혀 함께사는 길 찾아야





이런 나에게 지구 반대편 시카고의 호너 단지 이야기가 충격을 줬던 것은 단지 주인공 레퍼예트 리버스가 비슷한 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내가 경험한 아파트 생활은 천양지차였다. 영동AID아파트 시절 우리 집은 5층 건물의 1층이었다. 분양가 기준으로 아파트 가격은 200만원대 후반 정도였는데, 1층은 위층보다 30만~50만원가량 저렴했다. 당시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버지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상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으리라. 1층은 거실 창문을 통해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여 베란다에 갈대로 짠 발을 둘러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현관 앞 자그마한 잔디밭을 앞마당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단지 한편에는 우리 집이, 반대편에는 외삼촌 부부와 외할머니댁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두 집을 자유롭게 오가며 (사실은 주로 외가댁에서) 생활했다.

영동AID아파트의 40%는 공무원·군인·언론인에게 우선 분양됐고, 나머지 60%는 ‘컴퓨터 추첨’을 통해 일반에 분양됐다. 대개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젊은 중산층이었다. 대부분이 15평형이었기 때문에 두 자녀가 크면서 조금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는 단지 내에서 또래 형들을 쫓아다니며 낮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단지 안에서는 아이들끼리 몰려다녀도 별로 위험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어울려 딱지치기를 하거나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방아깨비나 풍뎅이 같은 벌레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슨 일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외할머니는 내 손목을 붙잡고 나를 울린 아이를 찾아 나서곤 하셨다. 외국인 도시 계획가들은 이 무렵 한강 이남에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을 두고 ‘병영’이나 ‘군대 막사’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내가 경험한 아파트 단지는 그야말로 일종의 마을이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다시 몇 군데의 아파트 단지를 옮겨 다녔다. 그러면서 아파트의 높이는 점점 높아졌고 동과 동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졌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가 더 이상 주거를 위한 테크놀로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아파트는 한편으로는 편리한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의 가치를 유지하거나 증식하는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아파트를 지을 땅을 확보하는 데 드는 비용이 올라갈수록 더욱 높게, 더욱 조밀하게 지어 용적률(容積率)을 최대한 높이려고 했다. 이렇게 5층 정도의 나지막한 아파트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수십층에 달하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역에 이러한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그에 따라 주변 지역에 차가 막히고 출퇴근 시간 지하철은 마음을 굳게 먹지 않고는 탈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모두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이렇듯 한국의 아파트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아파트와는 다른 종류의 현상이다. 외국인들이 서울을 방문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고층 아파트 행렬에 놀라곤 한다. 이는 서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성남·수원을 지나 동탄·평택에 이르는 대서울의 모습이다. 서울의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높은 인구밀도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모여 살게 되면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인구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늘어났다. 즉 아파트라는 테크놀로지는 ‘과포화 상태의 대도시’가 돼버린 서울의 주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설명이다. 정부는 서울의 낮은 주택 보급률을 들어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아파트를 공급했다. 그렇게 장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서울의 주거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호모 아파트쿠스’ 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객관적인 눈으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는 외부자의 시선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현명한 일이리라. 마침 이십여년 전 프랑스인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한국의 아파트를 연구하겠다고 서울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십여년 후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정리해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줄레조는 이 책의 결론에서 서울의 아파트 단지는 수십년 단위로 재개발이 일상화된 ‘하루살이 도시’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지적은 아파트 단지의 건설과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용적률은 점점 높아지지만, 인구밀도는 주택 구조의 변화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즉 고층 아파트를 짓는다고 해서 꼭 인구밀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가 과포화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파트가 욕망의 대상이 됐고, 그것은 아파트만이 계층을 상승시키거나 적어도 유지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파트는 인공물로서 기본적 기능보다 다른 기능이 훨씬 중요한 테크놀로지가 됐다. 이는 다주택자와 세입자가 점점 늘어나는 주거 양극화로 이어졌다. 이제는 1970년대 이래로 강고하게 유지된 ‘아파트 신화’를 깰 때가 되지 않았을까. 주거지 본연의 기능에 주목하지 않고 투자처로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무조건 대규모 아파트 단지만을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나처럼 평생을 아파트 단지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상상력의 폭을 넓히는 것만이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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