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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 나무에 걸린 홍의장군의 북 나라를 구하다

■나무로 읽는 역사- 경남 의령군 유곡면 '현고수'

강판권 계명대 교수·사학과

느티나무에 북 걸고 의병 모집

'충의 정신' 아래 2,000명 모여

정암진서 붉은 옷 입고 왜적 격퇴

줄기 절반 썩어 건강 안좋지만

마을서 해마다 기념행사 열어

'정암' 근처서 재벌 창업자 태어나

'부자바위'로 각광받는 곳 되기도

도(道)는 길이다. 인간의 착한 본성을 찾아가는 길은 의(義)다. 조선왕조 시대에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 최대의 위기였던 임진왜란 때 의로운 길을 걸었던 자들이 많았다. 그 중 망우당(忘憂堂) 곽재우(1552~1617)는 의병장으로 조선 의병 역사에서 빛나는 인물이다. 내가 곽재우에게 큰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나의 고향 창녕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분야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을 존경한다. 그 사람이 길을 만들기 때문이다. 처음 길을 만들기는 결코 쉽지 않다.

곽재우가 처음 의병을 일으킨 곳은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다. 이곳은 그가 탄생한 곳이다. 그런데 곽재우의 본관은 대구광역시 바로 현풍이다. 그의 묘소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곽씨 종택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다. 세간리는 곽재우의 어머니 강씨의 고향이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대부분 자식을 부인의 친정에서 낳게 했다. 의령에는 현재 곽재우의 생가터가 남아 있다. 그 생가터 앞에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다.

경남 의령군 세간면에 서 있는 느티나무 ‘현고수’.




세간리 느티나무는 의병운동과 관련된 나무여서 현고수(懸鼓樹)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현고수는 ‘북을 단 나무’라는 뜻이다. 곽재우는 그의 나이 40세 때인 1592년 4월22일 자신이 태어난 곳 마을 입구에 살고 있던 어린 느티나무 가지에 북을 걸어놓고 의병을 모았다. 그가 의병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일본 고니시의 제1번대가 그해 4월14일 병선 700여척에 나눠 타고 오전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5시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부산포에 침입한 지 7일 정도 지난 뒤의 일이었다. 조선의 임금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의주로 피란했다.

곽재우가 처음 의병운동을 시작할 당시 의병은 고작 노비 1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이틀 만에 50여명의 의병을 모집했으며, 1년도 안 돼 2,000명을 유지했다. 그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의병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충(忠)’의 정신 때문이었다. 충은 ‘자신의 마음을 다하다’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모두 국가에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의 양반을 설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병운동이 처음부터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대는 도망간 관군에게 속한 무기와 군량을 사용하다가 도적떼로 오해 받아 고발되기도 했다.

곽재우의 활약 중 가장 돋보인 장면은 1592년 5월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위치한 정암진(鼎巖津), 즉 솥바위나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붉은 옷(紅衣)을 입고 왜적을 물리친 것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홍의장군’이라고 불렀다. 곽재우를 유명인으로 만든 정암은 현재 ‘부자바위’로 각광 받고 있다. 왜냐하면 정암 근처에서 우리나라 유명 재벌의 창업자, 즉 삼성그룹 이병철, LG그룹 구인회, 효성그룹 조홍제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의병활동에서 세운 업적으로 여러 차례 벼슬을 받았다. 그는 정유재란 때도 많은 공을 세워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모두 받지는 않았다. 그는 필요할 때 벼슬을 받아 국가에 충성했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참으로 청렴한 일생을 보냈다. 자신의 무덤조차 검소하게 만들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그의 묘는 곽씨 문중의 묘 중에서도 봉분이 가장 낮다. 곽재우를 기념하는 핵심장소는 본관 대구가 아니라 의령군이다. 의령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있는 충익사가 있다. 아울러 그가 태어난 세간리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302호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곽재우가 태어난 세간리에는 천연기념물 제493호인 현고수와 더불어 천연기념물 두 그루가 사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한 마을에 수종이 다른 천연기념물이 두 그루 있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현고수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보기 드물게 나라를 구한 나무다. 현고수는 2008년에서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그동안 현고수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지 않았던 것은 건강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현고수를 수없이 만났다. 현재 현고수는 몸의 절반 정도가 썩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더욱이 현고수는 허리가 굽은 채로 수백 년을 살아왔다. 현고수의 허리가 굽은 것은 아마도 곽재우가 북을 걸어 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지도 거의 없는 현고수는 앞으로 살날이 많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조선 시대 최초의 의병운동을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운 현고수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매년 기념행사를 연다. 현고수의 몸에 두른 새끼줄과 밑동 근처에 뿌린 황토가 그 증거다.

현고수에 두른 시끼줄과 밑동 부근에 뿌려진 황토.


나는 현고수의 몸 상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척 아프다. 문화재청에서는 현고수의 썩은 줄기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구멍을 메웠다. 그러나 나무도 편안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그래서 강제로 구멍 난 곳을 메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나무의 목숨을 강제로 늘리는 것은 나무의 삶을 배반하는 행동이다. 나무는 평생 스스로 삶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위대한 존재다. 위대한 나무의 삶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다.

강판권 계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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