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3년 1월29일 취리히 시청사. 성직자와 대·소의회 의원(212명), 길드 대표 등 60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취리히 시의회의 회의 소집 목적은 토론. 의견 분열을 조정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면벌부) 판매 등을 비판하는 95개의 반박문을 발표(1517)해 종교개혁의 기운이 높던 시절, 취리히의 개혁 열망은 스위스의 어느 칸톤(canton·州)보다 높았다. 교회와 젊은 성직자들은 용병 문제와 금식, 수도원의 설교, 성인 숭배, 주교의 권위, 십일조 문제 등을 놓고 사사건건 맞섰다.
회의를 소집한 시의회는 토론에 두 가지 전제조건을 달았다. 누구든 주장의 근거자료로 성서만 인용할 것과 모두가 토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역 언어인 독일어를 사용할 것. 시의회의 조건은 사실상 개혁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성서뿐 아니라 신학자들의 저술까지 활용해 라틴어로 설교하던 교회는 불만이었으나 토론에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며 사제들을 대거 회의에 보냈다. 토론의 결과는 시의회가 의도한 대로 개혁파의 승리. 39세의 사제 울리히 츠빙글리는 성서를 조목조목 인용하며 토론을 승리로 이끌었다. 츠빙글리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려던 교회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2차 토론(10월)까지 이어진 취리히 대토론(Zurich Disputation)은 길고 굵은 파장을 낳았다. 수도원들이 문을 닫고 사제들이 떠난 자리에 ‘국가교회’가 들어섰다. 스위스판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전쟁을 불렀다. 개혁에 반대하던 칸톤들과 전쟁에 군종사제로 나섰던 그는 2차 카펠전투(1531)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난도질당한 시신은 돼지고기와 섞여 땅에 뿌려졌으나 츠빙글리가 남긴 미완의 개혁은 프랑스 태생 장 칼뱅이 이어받아 장로교회로 발전했다. 한국 개신교단의 다수가 칼뱅의 장로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츠빙글리는 실패했을까. 종교적인 판단을 넘어 경제의 측면으로 살펴봐도 그는 씨앗을 뿌렸다. 외세의 이해관계에 의한 용병 수입으로 먹고살던 스위스가 근대적 노동윤리 아래 목축과 공업지역으로 변모하는 데 깊은 영향을 끼쳤다. 츠빙글리는 목축업 등의 경제적 교환을 막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주범이 바로 영주들과 교회의 이기심이라며 성경을 들어 꾸짖었다.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한가운데에서 홀로 살려고 한다면 남는 것은 재앙뿐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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