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연루자들이 1심 재판에서 세 번 연속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특히 사건의 최대 쟁점이었던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개입 문제까지 면죄부를 받으면서 그 후폭풍이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은 물론 총선 과정에까지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송인권 부장판사)는 14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임성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인 송인권 부장판사는 최근까지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재판을 진행하던 법관으로 오는 24일부로 서울남부지법으로 자리를 옮긴다.
임 부장판사는 양승태 사법부 시절 재판에 청와대의 의중을 반영하도록 한 의혹의 핵심인물로 꼽힌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근무하던 지난 2015년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해 박근혜 전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들의 불법집회 관련 판결이 내려지자 재판장에게 양형 이유 중 민감한 표현을 수정·삭제하도록 요구한 혐의도 있다. 또 원정도박 사건에 연루된 프로야구 선수 임창용·오승환씨를 정식재판에 넘기려는 재판부의 판단을 뒤집고 약식명령으로 사건을 종결하도록 종용한 혐의도 적용됐다.
1심 재판부는 재판개입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이들 혐의가 직권남용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재판관여가 법관 독립을 침해한 위헌적인 행위인 것은 맞지만 형사수석부장판사가 재판 업무와 관련해 ‘남용할 직권’ 자체가 없다는 논리였다.
재판부는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를 받아) 임 부장판사에게 재판관여 행위를 위임·지시·명령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각 재판관여 행위가 수석부장판사의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에 해당해 징계 사유로 볼 여지는 있지만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임 부장판사의 요청을 받은 재판부들은 이를 무조건 따르지 않고 자기들의 법적 판단 등을 거쳐 독립적으로 결정했다”며 “약식사건 후속 절차를 보류하고 공판 절차 회부 통지서를 삭제한 행위도 담당 판사의 약식명령 발령에 따라 실무관이 후속 절차를 진행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난달 13일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이달 13일 신광렬·조의연·성창호 부장판사에 이어 임 부장판사까지 모조리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법농단 수사를 이끈 정치권과 김 대법원장, 검찰도 난처한 입장에 처한 것으로 진단된다.
2018년 9월 직접 법원을 찾아 ‘사법농단’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의혹을 반드시 규명하라”고 주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이탄희·이수진·최기상 전 판사들을 ‘사법농단 의인’으로 포장해 당장 총선에 내보내야 하는 더불어민주당은 “무리한 수사를 하명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 “제 식구 감싸기”라는 논리로 사법부와 대립해야 할 형편이다.
검찰은 2심부터 법원 판단을 뒤집을 증거와 논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사법행정 경험이 풍부한 서울고등법원 판사들의 문턱을 넘기는 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검찰은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과 이성윤 대검찰청 반부패부장의 지휘 아래 주요 민생 수사까지 모두 중단한 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때보다 더 많은 검사를 이 사건에만 7개월 이상 투입했다.
검찰은 “재판개입을 위한 직무권한이 존재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직권남용죄도 성립할 수 없다면 인사권자나 상급자의 어떠한 재판관여도 처벌할 수 없을 것”이라며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법원장은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을 위기에 빠졌다. 그는 문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화답하는가 하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던 지난해 1월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이 기소도 되기 전에 허리를 숙여 국민들에게 사과하면서 법원 내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7개월 넘게 뭉개던 임 전 차장의 재판부 기피 신청을 갑자기 기각하고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를 전례 없이 서울중앙지법에 5년째 잔류시켜 “대법원이 대놓고 유죄 심증을 내비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받았다. 그의 자체 사법개혁안은 지금도 국회의 외면을 받고 있지만 무죄 판결이 더 이어질 경우 개혁동력 자체가 증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편 임 부장판사와 재판개입 공범으로 지목된 임종헌 전 차장은 이번 판결로 한결 유리한 입장에 선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 강제징용 판결 연기 등 비슷한 직권남용 혐의를 41개나 적용받은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부 역시 이번 판결을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부장판사 출신으로 최근 법복을 벗은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처음부터 ‘양승태 사법부 적폐 라인’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을 수사한 사건으로, 검사들조차 물증도 없이 수사 결과를 내기 위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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