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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대처 총리 끌어내린 인두세 폭동

1990년 중산층 이하 거센 반발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대치 중인 시위대와 런던 기마경찰. /위키피디아




1990년 3월31일 정오 영국 런던 케닝턴 공원. 18만~25만명으로 추산되는 시위대가 모였다. 경찰 추산은 4만여명(정작 경찰은 1년 뒤 발간한 종합보고서에서 시위 군중을 20만명으로 추정했다). 행진을 시작한 시위대는 오후 2시30분께 트래펄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사람이 너무 많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경찰은 추가 진입을 억제하려 통로를 막았다. 런던 지하철 주요 역도 무정차 통과 명령을 받았다. 평소와는 다른 경찰의 진압에 흥분한 시위대는 격렬한 저항으로 맞섰다. 오후6시 무렵부터 극한 대치를 시작한 경찰과 시위대는 이튿날 새벽까지 쫓고 쫓겼다.

시위대는 고급 상점가에 돌을 던졌다. 결국 시위 당일 339명이 체포되고 1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로 런던에서만 491명이 재판정에 섰다. 전국적인 시위를 부른 요인은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부가 추진한 인두세(人頭稅·poll tax). 말 그대로 소득과 재산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매긴 세금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가뜩이나 대처 행정부 등장 이래 공공복지 축소로 생활이 어려워진 중산층 이하 계층의 반발이 가장 거셌다. 탄광 노동자들도 적극 가담했다.



대처의 보수당 정권이 인두세 신설을 추진한 이유는 두 가지. 첫째, 1980년대 후반 파운드화 위기까지 야기했던 재정 압박을 극복하기 위한 돈이 모자랐다. 둘째, 핵심 지지계층에 대한 오랜 약속이었다. 주택 크기에 따라 주민세를 내는 게 불합리하다는 지지층의 불만에 대해 대처 총리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게 발목을 잡았다. 재산이 많은 상류층의 편익을 위한 소득 역진적인 인두세 징수에 대한 반발은 11년간 장기집권해온 대처 총리의 정치적 몰락을 앞당겼다. 대처는 연말에 치러진 보수당 내 선거에서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대처를 승계한 존 메이저는 이듬해 총리로서 첫 연설을 통해 “인두세를 없애고 각 지방이 징수하는 주민세로 바꾸겠다”고 약속해 조세저항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영국 총리로는 드물게 장기집권했던 대처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다. ‘영국을 수렁에서 구한 영웅’이라는 찬사와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라는 혹평이 상존한다. 확실한 점은 물러날 때는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극렬한 저항을 부른 인두세를 납부하는 나라는 오늘날 거의 사라졌다. 대한민국은 일본과 더불어 ‘주민세’라는 세목으로 사실상의 인두세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나라에 들어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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