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의 매력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여러 이단들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호위했던 강고한 기독교 교부이자 깊고 풍부한 개성을 지닌 작가였다. 그가 쓴 ‘고백록’은 솔직하고 대담한 자기 고백이 대단히 매력적인 책이다. ‘고백록’을 읽으면 한 구도자 내면에 치열하면서도 섬세하게 아로새겨진 결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내용보다 언어의 장려함에 마음이 끌릴 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의 관찰처럼, 그의 언어는 너무도 현란하여 눈을 뗄 수 없고, 거기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려는 의지마저 무너질 정도다.
‘고백록’은 중세의 기독교 철학을 대표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운 기독교 원리에 대한 밝은 성찰로 나아가는 동시에 한 개인의 내면에 젖어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두 길을 함께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아, 나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 원리의 이해보다 그것을 세우려는 절절한 마음에 더 다가선다.
아우구스티누스적 확신
13권으로 이루어진 ‘고백록’의 1권부터 9권까지는 과거 삶의 회고를, 10권부터 13권까지는 현재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회고의 내용을 부차적으로 여겨 ‘고백록’의 진수가 후반부의 신학과 철학에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그렇게 전제하며 책을 썼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백록 1.1.1.) 신을 ‘향해’ 살 때 비로소 그분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이룬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고백록’은 신에게 ‘등을 돌리고’ 방황하던 미숙한 시절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른바 ‘아우구스티누스적 확신’은 방황을 제거하고 무화시키기보다 방황이 필연적으로 섞여 들어간 상태를 가리킨다. ‘고백록’은 현재의 확신이 과거의 방황을 흡수하기보다 그 둘이 서로 기대는 식으로 쓰여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념, 과거의 방황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쓴 대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으며 거기 그려진 디도의 자살을 슬퍼한다. 디도는 트로이 함락 후 떠돌다가 카르타고에 체류하던 아이네이아스에게 정열을 쏟지만 그가 떠나자 자살을 한다. 이후 아이네이아스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그녀를 만난다. 그는 로마 건설이라는 명예로운 길을 따라가느라 디도를 떠났지만, 자기 때문에 자살한 그녀를 불쌍히 여긴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슬픔은 아마도 아이네이스의 연민에서 나왔으리라. 하지만 ‘고백록’을 쓰는 성숙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때의 슬픔을 어리석었다고 회고한다. 잘못된 사랑으로 인한 자살은 신에게서 멀리 떠나있다는 죄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고백록’은 죄를 지은 인간이 신의 은총을 받아 구원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여정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은 시간에 대한 성찰과 맞물린다.
시간의 성찰
그런 면에서 시간과 영원을 다루는 11권은 ‘고백록’의 정수를 이룬다. ‘창세기’의 비평가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빛이 생겨라”라는 신의 말씀이 처음과 끝이 있는, 시간을 따라 만들어지는 소리임을 주목한다. 시간에 매인 소리를 내는 신이라면 시간에 매인 유한한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신은 “모든 과거의 시간 전에도 계시고 모든 미래의 시간 후에도 계시는 분”(고백록 11.13.16)이다. 따라서 신의 말소리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영원하다. 과거와 미래는 신의 말소리가 발화되는 영원한 현재 안에서 창조되고 흐른다. 미래는 ‘아직 없고’ 과거는 ‘이미 없다’. 현재가 항상 현재로 남을 때 그것은 시간이 아니고 영원이 된다. “당신의 오늘은 영원입니다.”(고백록 11.13.16)
하지만 우리 마음은 미래를 기대하고 현재를 직관하며 과거를 기억한다. 우리 인생은 마치 시를 읽는 것과 같다. 시를 읽기 전에 우리 마음은 시 전체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읽은 부분은 기대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기억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이 계속되는 동안 기대의 영역은 점점 짧아지고 기억의 영역은 점점 길어져 마침내 기대의 전부가 없어진다. 그때 시를 읽는 활동도 끝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을 때 우리는 기억만을 안고서 삶을 끝낸다. 그러니 기대할 이야기를 품는 일은 곧 삶을 지속하는 일이다. 기대가 기억으로 계속 흐르며 일어나는 시간 위에 우리의 삶을 싣는 것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마음의 분산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는 시간 위에 서 있는 이상 현재의 마음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기대와 기억으로 헷갈리기 마련이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의 분산이라 부른다. 마음의 분산은 시간에 속한 일인 반면 마음의 집중은 시간을 초월하는 일이다. 그는 마음의 집중이 신을 만나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는 마음을 집중해 신을 만나려 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실려 산산이 분열된다. 그런 그는 삶의 저편보다 삶의 이편에서 견디고 있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현재의 직관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목표로 자리할 뿐이다. 우리 삶은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기대를 품고 기억을 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채워진다. 기대만 있고 기억은 전혀 없는 상태가 삶의 시작이고, 기대는 하나도 남지 않고 기억만 있는 상태가 삶의 끝이라면 그 둘 사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삶의 여정은 기대하고 기억하는 마음의 분산으로 이루어진다.
고백의 두 갈래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하는 내용은 시간이 흐르는 상태와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 대한 것으로 나뉜다. 과거의 기억을 담고 미래의 기대를 향해 나아갈 때 그의 고백은 과거를 돌아보며 뉘우치는 동시에 미래에 이룰 성취를 꿈꾼다. 이 고백이 인간 삶에 머문다면 현재의 확신을 담는 고백은 신을 향한다. 신을 향한 고백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미래의 기대로 나아가지 않으며, 오로지 현재의 직관에 정향된다. 때로 과거의 잘못을 짚고 회심해 미래를 기대하느라 마음이 흔들리고 분산되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꾸만 기도를 올린다. “나를 붙잡아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기도는 애틋하고 포근하다. 그는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면 잘못 사는 것이요, 죽음밖에 되지 않으나 신 안에 있게 되면 다시 사는 것이 된다고 호소한다. 그리하여 ‘고백록’에서 시간의 흐름에 실린 고백은 현재에 집중하는 고백으로 수렴된다.
그의 젊은 시절 기억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기에는 아무런 불순물도 없어야 한다. 절대 순수의 상태. 완전한 존재에의 귀의. 우리는 그것이 ‘고백록’의 진수라 생각한다. 하지만 ‘신’이란 묻는 존재가 아니던가. 신은 우리에게 너는 사회의 일원으로, 삶의 주체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런 물음에 치열하게 답하는 식으로 ‘고백록’을 썼다.
그러니 ‘고백록’을 전반부의 헤매임을 후반부의 확신으로 귀결시키는 식보다 그 둘을 병렬하는 식으로 읽어보자. 과녁에 꽂혀 바르르 떨리는 화살의 희열은 날아가는 과정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 과정이 우리의 삶이다. 과녁에 꽂히느냐의 여부는 초월자의 뜻이거나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다만 과녁을 노려보며 활시위를 당기고 버티다가 놓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학적 감수성
‘고백록’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서 울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는 우리를 신과 만나는 길로 이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풍부하고 섬세하다. 그의 언어는 신과의 만남의 ‘의미’를 말해주기보다는 그 의미를 ‘경험’하도록 해준다. 스스로 마음에 찍어 남긴 언어로 신을 대면하고자 했던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 도드라진다.
‘고백록’은 인간이 걷는 삶의 여정의 표현이다. 이 책을 쓰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의 잘못을 돌아보는 한편 현재의 믿음을 확신한다. 하지만 그 회심 속에는 기억과 기대로 흔들리며 살아온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신과 만나는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마음의 분산을 다독이며 끊임없이 기도를 올리던 삶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에도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고백록 12.10.10) 신에 안겨 안식을 얻은 모습보다 어둠을 헤치며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마음을 더 어루만진다. 아마도 그는 인간으로서 신과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둠을 걷어내기보다 벗 삼아 가는 끝없는 방황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신을 사랑하고 기억함으로써 방황을 이어간다는 역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더욱 깊은 마음의 성찰가로 다가온다.<부산외국어대 교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