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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32년 일본 5.15사건

경제난과 전쟁의 광기

수상이 암살되는 ‘미증유’의 사건을 보도한 일본 아사이 신문 보도./위키디피아




1932년 5월 15일 일요일 오후 5시 27분, 일본 도쿄 총리 관저. 승용차 2대에 분승한 해군 중위를 비롯한 위관 4명과 육사 생도 5명 등 9명이 들이닥쳤다. 경비 중인 순경에 총격을 가해 중상(11일 후 사망)을 입힌 장교들은 총리를 찾았다. 미국 배우 챨리 채플린을 기다리던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77세)는 피신하라는 측근들의 말을 듣지 않고 대화를 시도했으나 끝내 총을 맞고 죽었다. 정치에 불만을 품은 청년 장교들의 세력은 더 있었다. 경시청과 일본은행, 정당 당사와 미쓰비시 은행에 수류탄을 던졌다. 일부는 변전소를 습격해 도쿄를 암흑으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무산됐다.

취조 결과 밝혀진 봉기의 배경은 국가 개조.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가 불안한 가운데 군축조약에서 일본만 손해 봤다고 여겼던 해군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썩어 빠진’ 정치인들을 제거하면 군의 원로 선배들이 정권을 장악해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망상을 품었다. 재벌 말살을 부르짖으며 재벌 총수를 사살한 뒤, 수사망이 좁혀오자 거사를 일으켰다. 동원한 병력 없이 12명의 장교들과 사관생도, 일부 농민이 참가했던 이날의 거병은 테러 수준에 그치고 전원이 붙잡혔다.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은 민간인 농부 한 사람만 무기징역을 받았을 뿐 형량이 비교적 낮았다는 점. 다음으로 높은 형이 금고 15년(1명), 13년(1명), 10년(3명), 금고 4년(13명) 등으로 그쳤다. 더욱이 이들은 전국적인 구명운동이 일어나며 35만명이 석방 청원서에 청원해 1, 2년 만에 대부분 풀려났다. 청년 장교들의 테러는 실패했어도 일본 정치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무엇보다 정당정치가 사라졌다. 걸핏하면 칼을 휘두르고 중앙정부와 상의 한마디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행태를 보면서 정치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재벌과 정치인을 몰아내고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자는 청년 장교들의 급진적인 국가 개조론은 국민들의 환심을 샀다. 일본 국민들은 파산하는 경제 속에서 희망을 잃고 살기보다 침략 전쟁을 통해 실의를 풀어나갔다. ‘대대적 천황 숭배’라는 광기가 전쟁과 패망으로 이어진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일본의 후진성이 있다. 히틀러를 적극 지지했었던 독일 국민들이 과오를 반성한 것과 달리 일본은 사과조차 인색하다. 5.15사건과 더불어 청년 장교들의 반란 사건인 2.26 쿠데타도 말 한마디로 뒤집을 만큼 권위를 자랑했던 일본 국왕도 전범 행위에서 빠져나갔다. 왕을 비롯해 일본 국민 모두가 전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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