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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영국, 왕정복고

1660년 찰스2세 런던 입성





1660년 5월 29일 영국 런던, 돌아온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찰스 2세. 초년 운은 혼란으로 점철됐다. 부왕(찰스 1세)과 의회의 갈등으로 12살 때 터진 내전을 피해 16살에 프랑스로 쫓겨났다. 19살에 아버지의 참수 소식을 듣고 스스로 왕위를 계승하며 군사를 일으켰으나 결국 지고 말았다. 갈수록 복귀 가능성이 희박해져 유럽을 떠돌던 그는 갑자기 기회를 잡았다. 왕정을 없앤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죽고 그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공화정 호국경 지위를 세습하자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진 터. 1659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은 망명 왕가를 불렀다.

크롬웰이 소집한 의회가 해산되고 1660년 3월 치러진 총선에서 왕당파가 대거 당선된 직후 그는 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짐은 누구에게든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노라. 세금과 법령 같은 문제도 의회에서 결정해 주기를 바라노라.’ 훗날 ‘브레다 선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편지는 영국인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내전과 국왕의 참수형, 크롬웰의 독재정치를 거치며 형성된 혼란과 분열을 극복하려 왕정복고를 추진하던 시기에 적법한 왕위계승자가 자애로운 마음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1660년 5월 25일 도버에 상륙한 그는 수많은 인파의 환영에 막혀 나흘 만에야 런던에 입성, 정식 국왕 자리에 앉았다. 정작 그는 크롬웰의 시체를 부관참시하고 ‘반역자’ 13명을 가려내 목을 잘랐다. 청교도를 탄압하는 등 브레다 선언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나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정치보복이 예상보다 심하지 않았던데다 30세에 신장 185㎝의 젊은 국왕이 다방면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덕분이다. 학술 토론에 참석해 ‘왕립학회’라는 칭호를 내리고 런던 대화재 때는 진화 작업을 손수 이끌었다.

망명 시절 익힌 요트도 국민 스포츠로 퍼져 나갔다. 32세에 맞이한 8년 연하 포르투갈 출신 캐더린 왕비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봄베이(현 뭄바이) 지배권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크게 뒤졌던 후발 주자 영국이 인도에서 세력을 구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국에서 차가 유행하게 된 것도 캐더린 왕비를 통해서다. 찰스 2세는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인신보호령(1679)’ 등 주요 사안에서는 의회에 양보하는 관용을 보였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점은 경제정책의 일관성. 크롬웰이 제정한 항해조례를 강화하고 순도 높은 은화를 주조해 파운드화의 신뢰도를 높였다. 영국이 혼란을 딛고 도약하는 데는 두 가지 기반이 있었다. 지도자가 갖춘 최소한의 관용과 정책 일관성.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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