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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의 뒤안길] 문화재 인식의 시작

1909년 '명소고적'서 인식·계몽노력 엿보여

황성신문 1909년 7월 13일자에 실린 ‘명소고적’ 기획기사. /사진출처=국립중앙도서관




우리나라 문화재 인식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라고 알려져 있다. 문화재라는 개념이 일본인들에 의해 도입되고 제도화됐다는 논리다. 지금의 문화재 체계가 일제강점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스스로는 우리 문화재를 인식하고 제도화할 수 없었을까. 통감부 시절이기는 하지만 강제병합 이전인 지난 1909년 우리민족 지식인들이 발간했던 ‘황성신문’에 의미 있는 기획기사가 연재됐다. ‘명소고적(名所古蹟)’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산하와 옛 유적들을 소개해 그 우수성과 의미를 국민에게 일깨우는 기사들이다. 여기에는 전국 각지 경관과 유적들이 72회에 걸쳐 소개됐다. 우리가 잘 아는 첨성대 같은 유적도 있고 지금은 문화재로 인식하지 않는 산이나 강도 저마다의 역사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 것들을 알려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음이 보인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구한말 지식인들의 주체적 문화자산 인식과 계몽 노력이 보인다. ‘명소고적’은 당시 지식인에게 우리의 옛것들을 지칭하는 집합 단수대명사로 사용됐다. 지금의 문화재(文化財)처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진작부터 진행했던 고적 조사를 확대해 그들의 시각으로 정리하고 제도화했다. 우리의 문화재 인식과 제도는 근대의 불행한 역사와 함께 주체적인 시작을 맞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것을 스스로 만들려 한 노력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부단한 독립운동을 했고 국외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 속에서 주체적 문화재 인식과 보존 노력도 함께 전개했다.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관제’ 중 내무부 지방국 사무에 ‘명소고적 보존에 관한 사항’을 하나의 독립적 항목으로 명시해 문화재 보호에 관한 제도적 노력을 했음이 확인된다. 명소고적은 1909년이나 1919년에도 우리 땅에서 실효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 개념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주체적인 문화재 인식과 제도화 노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오춘영 문화재청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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