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변하지 않으면 ‘돌연사(sudden death)’ 할 수 있다.”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은 지난 3월 화상으로 열린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각 사가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난 2016년 일명 ‘딥 체인지(Deep Change)’ 선언 이후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위기의식 재무장을 다시 한 번 요구한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단순한 위기론이 아니다. 그룹 내부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하다는 게 회사 안팎의 전언이다. 코로나 사태의 영향도 있지만 핵심 업종의 ‘초호황’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실적과 현금창출능력의 꺾임세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북미 인프라, 베트남 등 해외사업에 선제적으로 집행한 조(兆) 단위 투자도 삐걱거리는 움직임도 있다. 수년 전부터 필요성이 제기된 지배구조 재편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 “동시다발 적인 작금의 상황을 SK가 어떻게 돌파할지를 예의주시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잠재적 위험요인들이 많다는 얘기다. 서울경제 시그널이 SK의 현 주소를 두 차례 걸쳐 점검한다.
◇1년새 급감한 현금창출능력…“위기관리 능력 시험대에”
아직은 크지 않지만 SK그룹에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정유·화학, 에너지, 통신, 반도체 등 다각화된 사업 포트폴리오와 각 업권별 최상위 수준 시장 지배력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해왔지만 최근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어서다.
IB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SK의 주력 업종인 정유·화학과 반도체 업종의 초호황기가 저물면서 투자 속도와 리스크를 조절하는 ‘관리 모드’로 전환이 이뤄졌어야 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속도감 있는 강제 조정이 필요하게 됐다”며 “SK의 위기 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섰다”고 진단했다.
당장 돈줄이 말라가고 있다. 물론 그룹의 규모가 있기 때문에 총량이 적지는 않다. 그래도 여타 그룹의 규모를 고려할 때, 안심할 수준은 아니다.
올해 1·4분기 SK(연결기준)의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흐름은 9,948억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2조502억원에 비하면 절반을 밑돈다. 본업에서 벌어들인 현금이 그만큼 줄었다는 의미다. 주력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096770)이 이 기간 유가 급락으로 직격탄을 맞았고 SK하이닉스(000660)도 미·중 분쟁 등의 직접적 영향권에 놓여있다.
반면 호황기에 공격적으로 설정한 투자 계획은 부담이 되고 있다. 업종 별로 보면 정유화학 부문에서 매년 2조~3조원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으며 반도체 부문에서도 캐파(생산능력) 확장 및 공정 미세화를 위해 매년 수 조원대 투자가 필요하다. 통신부문에서는 5G 네트워크 고도화를 위한 투자가 필수적이다. 영업현금흐름이 약화하는 상황에서 투자규모가 과중해 재무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기업 건전성 지표인 이자보상비율을 보면 이 같은 현실이 잘 드러난다. 2017년의 SK는 탄탄했다. 당시 SK는 5조5,45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이자비용으로는 7,835억원만 지출해 이자보상비율이 7.33배에 달했다. 이자보상비율이 크다는 것은 한 기업이 이자를 내고도 많은 이익을 남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비율은 2017년 이후 내리막을 타 2018년(4.39배)과 2019년(2.86배로) 2년 연속 감소했다. 올해 1·4분기에는 영업손실이 나면서 비율 값이 사실상 ‘제로’(0)를 밑돈다.
국내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연결 기준 부채비율이 163% 수준으로 상승세이기는 하지만 차입금 만기 도래시점이 대체로 잘 분산돼 있는 것은 장점”이라면서도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 전략 마련과 투자 속도 조절 등이 향후 재무관리의 관건이 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신용등급 ‘흔들’에 자금 경색 우려…“일부 계열사의 문제, 확산 여부가 관건”
현금 창출 능력 저하는 신용등급 강등 우려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최근 그룹의 1·4분기 실적을 반영해 핵심 계열사인 SK이노베이션의 등급 전망을 기존 ‘AA+,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일제히 조정했다. 이는 석 달 이내 회사 신용등급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에너지와 SK인천석유화학의 신용등급도 각각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함께 하향됐다. 특히 SK인천석유화학의 경우 현재 등급이 ‘AA-’여서 등급 강등이 이뤄져 ‘A+’ 등급으로 낮아질 경우 일명 ‘신용 절벽’ 위기에 마주칠 수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의 등급 하락 속도는 이보다 더 숨가쁘다. 무디스는 지난 2월 SK이노베이션과 SK종합화학의 신용등급을 각각 ‘Baa1’에서 ‘Baa2’로 하향 조정한 뒤 두 달 뒤인 4월에는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끌어내렸다. 무디스는 지난해에도 SK하이닉스 등급 전망을 하향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자금 조달에서도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SK에너지는 기존에 만기 3~4일짜리 단기 기업어음(CP)만 발행했으나 지난 2월부터는 최대 6개월물 CP까지 발행해 회사채 시장 경색을 이겨내고 있다. 또한 SK에너지는 SK인천석유화학과 더불어 최근 매출채권 유동화증권도 발행하고 있는데, 이 증권의 이자율은 같은 만기 기준 회사채보다 통상 1.0% 포인트 가량 높아 이자부담을 가중하는 요인이 된다. SK인천석유화학의 경우 오는 7월 말 1,200억원 규모 회사채 만기를 앞두고 있어 이 사이에 신용등급 강등이 이뤄질 경우 차환 금리가 대폭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더불어 정유화학 부문의 중간 지주사 격인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 대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다 최근 LG화학과 영업비밀 침해 소송전에서 ‘조기 패소’ 판결을 받아 오는 10월 최종 판결 이후 일종의 우발 채무가 대규모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SK의 자금 경색은 일부 계열사의 문제일 뿐 전체 회사로 확대해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당장 SK가스와 SK브로드밴드가 이달 이후 2,000억원 이상의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SKC(A+)도 최근 증액 발행에 성공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내 신용평가기관 관계자는 “유사시 SK그룹의 지원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사채 발행 여건은 긍정적이지만 코로나에 따른 실적 회복 시점이 언제로 봐야 하느냐가 문제”라면서도 “개별회사의 문제가 확산할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서일범·김민석·김민경기자 squiz@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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