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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끝나지 않는 슬픔의 시작

작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어린시절 상처·고통에서 시작 많아

어른 이기심·분노가 아이들 망쳐

목숨 빼앗는 아동학대 사슬 끊어야

정여울 작가




계모의 학대로 비좁은 여행용 캐리어에 갇혀 미처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아홉 살 소년의 뉴스를 본 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발육부진 상태에서 굶기를 밥 먹듯 했을 그 아이의 무참한 배고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절망감, 집안에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들 중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외칠 수 없었을 아이의 고립감을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아프고 또 아팠을까. 우후죽순처럼 터지는 아동학대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와 존중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아이들의 고통은 단지 어린 시절의 나쁜 기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고백하는 어른들의 대다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라는 늪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범죄로 이어지는 아동학대가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이 남몰래 겪는 아픔은 곧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의 아픔에 귀기울이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뿌리깊은 편견을 지워내기 어렵다. 어차피 사람들은 날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날 좋아해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난 미움받는 게 당연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쌓이다 보면 눈앞에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일 거야’라는 의심이 자라면,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는 물론 사랑할 수 있는 기회까지 놓쳐버린다. 내가 실수하고 잘못해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은 삶을 향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 학대는 자기혐오로 이어지고, 자기혐오는 자기징벌을 가져오며, 자기징벌은 곧 타인을 향한 끝없는 불신으로 치닫는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에게 ‘요새 아이들은 뭘 좋아하냐’고 물어봤다. 요새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었고, 우리 때와 달리 아이들은 뭔가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랬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학부모는 변했지만, 아이들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사를 존중하지 않고, 교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학부모들이 많아졌지만,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예뻐해 주세요” “선생님, 저를 많이 예뻐해 주세요.” 아이들이 선생님께 바라는 신학기의 소원으로 가장 많이 적는 메모라고 한다. ‘예뻐해 주세요’라는 그 짧은 문장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불에 덴 듯 아픈 상처가 되살아났다. 전교생이 다 보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내 등짝을 사납게 후려치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를 때리고, 괴롭히고, 폭언을 일삼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께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도 어쩌면 그것이 아니었을까.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예뻐해 주세요. 아이들은 정말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똑같이 순수하고 똑같이 애틋하다. 문제는 어른들의 이기심, 어른들의 분노가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뿐 아니라 생존의 권리, 목숨까지 빼앗는 무서운 아동학대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 아이들이 학대받지 않는 세상을 얻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의 행복을 얻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말았으면. 비좁은 여행가방에 갇혀 고통뿐인 삶을 마감한 아홉 살 소년의 말 없는 외침 또한 그것이 아니었을까. 예뻐해주세요.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저를 사랑해 주세요. 제 곁에 있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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