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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22세 워싱턴 중령의 항복

1754년 작지만 세계 뒤흔든 네세시티 전투

워싱턴 중령이 급조했던 네세시티 요새의 흔적. /위키미디어




1754년 7월 3일 북미 오하이오 지역 네세시티 요새. 영국 민병대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22세의 젊은 중령이 지휘하는 영국 민병대의 패배는 불가항력이었다. 35일 전 프랑스군과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갈수록 병력 차이가 벌어지고 장거리 원정에 따른 피로가 누적된 탓이다. 버지니아 식민지 지원병으로 구성된 영국 민병대의 병력은 약 400명. 급하게 목책을 세웠으나 프랑스군 700여 명(원주민 100명 포함)의 포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몇 차례 교전에서 전력 차이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영국의 인명 손실은 31명 전사에 70여 명 부상. 프랑스군(전사 3명, 부상 19명)보다 피해가 훨씬 컸다. 위기의 순간, 젊은 중령은 백기를 흔들며 항복 의사를 밝혔다. 무기를 휴대한 채 철수하겠다는 항복 조건을 프랑스군은 받아들였다. 네세시티 전투는 규모가 작았어도 두 가지 큰 흔적을 남겼다. 첫째,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불을 당겼다. 둘째, 미국 독립에 영향을 끼쳤다. 영국 민병대 지휘관인 22세 젊은 중령의 이름은 조지 워싱턴. 훗날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독립전쟁을 이끌고 초대 대통령을 맡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원인은 오하이오 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 오하이오 지역이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과 오하이오 강 북쪽, 이리 호 남쪽 지역의 통칭. 오늘날 오하이오주와 인디애나주의 동부, 펜실베이니아주 서부, 웨스트 버지니아주 북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려 영국과 프랑스의 개척민, 정규군, 원주민 부족들이 싸웠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18세기 판 패권 경쟁인 7년 전쟁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각 지역과 인도와 중남미, 북미에서 자웅을 겨룬 7년 전쟁은 ‘최초의 세계대전’(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 ‘대공황의 세계’)으로 앵글로 색슨이 세계를 지배한 시발점으로도 꼽힌다.

워싱턴이 군복을 입게 된 연유는 형의 죽음. 폐결핵으로 죽은 이복형의 재산과 영국군 소령 계급장을 20세에 물려받았다. 패장이던 그는 대령으로 승진했으나 모논가헬라 전투(1755)에서 무수한 인명을 잃고 또다시 항복하고 말았다. 두 차례 항복에도 그의 평판은 오히려 올라갔다. 전장을 수습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리더십을 보여준 덕분이다. 104개 대대에 이르렀던 대륙군의 급속한 축소에 반발한 엘리트 장교들의 쿠데타 음모가 무산된 것도 워싱턴의 리더십 덕분이다. 한두 번 지면 패자의 멍에를 씌우고 권력을 잡으면 휘두르는 우리 사회에서도 워싱턴 같은 사례가 나올 수 있을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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