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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만 산다는 이촌동! 50년 넘은 아파트에 숨겨진 비밀이? [영상]

역사와 부동산의 만남 '역지사지' EP.5

정부의 개발차로 딴판 된 동부와 서부 이촌동

한강르네상스 개발 무산으로 주민들 고통받은지 7년

이번 용산 개발은 이뤄질까?







강변북로를 타고 쭉 한강을 지나다보면 한강변에 늘어선 오래된 맨션들을 보고 “저렇게 좋은 한강뷰라면 집값이 얼말까?”궁금하셨던 분들 많을 겁니다.

역시나 부동산 사이트를 켜고 들어가 보면 71년도 지어진 ‘한강맨션아파트’가 22억(103㎡), 5년 된 ‘래미안 첼리투스’가 33억(165㎡). 심지어 그나마 좀 싸다 싶은 ‘이촌 우성’이 11억(80㎡). 정말 ‘억’ 소리 나는 아파트들인데요. 한강이 남향뷰인데다 약 50년된 오래된 아파트들이 재건축을 줄줄이 앞두고 있고 용산 개발 호재까지 떠안아 더욱 미래가 주목되는 곳이죠. 이번 주 역지사지 다섯번째 주인공은 서울 용산구 이촌동입니다.


‘이촌동’이라 하면 원효대교 북단 동쪽부터 동작대교 북단 서쪽까지를 말합니다. 한강을 둘러싸고 길게 꼬리 모양으로 생긴 지역입니다. 위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전쟁기념관, 넓은 부지의 녹지공간, 남쪽엔 한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용산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촌동 중앙에 위치한 ‘제1한강교’는 한강에 놓여진 최초의 인도교로 1917년 준공됐지만 홍수, 한국전쟁으로 다리가 유실됐다가 1958년 복구 후 ‘한강대교’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한강대교를 건너면 바로 강남권인데다, 바로 아래 강변북로, 여의도까지 차로 10분, 철도 또한 용산역을 끼고 있어 이촌동은 외부로 나가는 도로 교통이 매우 좋은 입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용산 초등학교, 용강 중학교, 중경 고등학교 등 초,중,고도 각 1개씩 있어 ‘완벽한 학군 클러스터’도 형성되어 있죠.

동부 이촌동과 서부 이촌동은 이 한강대교를 가운데 두고 생활권이 나뉘어있는데요. 이름은 같은 ‘이촌동’이지만 삶의 모습은 꽤나 격차가 큽니다. 바로 정부의 개발차가 심하게 벌어지며 동부는 부촌이 됐고, 서부는 아주 낙후한 지역이 됐기 때문인데요. 같은 운명을 타고 태어났지만 지금은 완전 딴 판의 모습이 된 동부와 서부의 이야기, 지금부터 함께 보실까요?





■가난했던 이촌, 차별의 역사

거리로 따지면 형제 격인 동부와 서부 이촌동은 원래 일제강점기까지 한강 변두리에 있던 빈민가였습니다. 지명이 이촌동인 이유도 ‘두 이(二)’가 아니라 ‘옮길 이(移)’라 할 정도로 주거지를 자주 옮겨야 하는 팔자의 땅이었죠. ‘한국의 지명변천’에 따르면 “원래 이곳은 모래벌판으로 여름철 홍수가 들면 강 가운데 섬마을(노들역)에 살던 주민들이 강가 언덕으로 옮겨 살아야 했다”고도 했습니다. 예전 사진을 보면 강변을 따라 쭉 늘어선 판자촌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때는 동부와 서부의 구분이 별로 없어 보이죠.

가난했던 이촌동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가슴 아픈 차별의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군부대와 철도역에서 근무하는 일본인들은 주로 용산역 부근에서 거주했었는데요. 그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가 남대문 밖 용산에 주둔했던 게 계기였다고 하죠. 당시 용산 땅 300여 만 평이 일본 군사기지로 조성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912년엔 이촌동과 용산 일대가 대규모 홍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홍수로 피해입은 일본군은 총독부에 ‘제방’ 건설을 청원했습니다. 총독부는 이를 수용해 구용산에 제방을 건설했지만 이촌동은 제방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 또 한 번 홍수 피해를 입었을 때에도 총독부는 이촌동을 배제한 신용산을 제방으로 막아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촌동 주민들이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조선인이 많은 이촌동은 알바 없다는 것이었죠. 당시 경성부 토목과장은 화가 난 이촌동 주민들에게 “못 살겠으면 이사가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황당했던 이촌동 주민들은 탄원서 제출과 항의집회를 열어갔고, 국내 대형 종합언론까지 이에 가세했습니다.



결국 경성부는 할 수 없이 공사 착수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사 비용 일부와 현장 노동을 주민들이 직접 해야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역시 어처구니 없는 조건이었지만 주민들은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총독부에서 거절당하면서 이 역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5년 뒤 역사적으로 유명한 1925년 대홍수가 왔을 때 이촌동은 결국 과반수의 주택이 쓸려 내려가 황무지화되었습니다. 용산역 관사가 1층까지 물에 잠기고, 지대가 낮은 뚝섬, 송파, 잠실리, 신천리, 풍납리까지 초토화되었습니다. 수많은 동이 물에 잠겼지만 총독부는 유독 이촌동에만 ‘폐동’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불어 조선인 거주조차 금지시켰는데요. 이를 두고 ‘한국사 연구’ 논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방 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당시 한인 차별의 전형으로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에게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런 문제였다. 식민 정부의 입장에서는 서부이촌동민이 이주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핍박받던 이촌동에 이번에는 50년대 6.25전쟁 때 미8군 쓰레기 처리장이 설치가 됐습니다. 처리장에서 나오는 오물로 밥을 해먹을 정도로 당시 절박하게 생계를 이어나갔죠. 또 폭발하는 서울의 인구만큼 늘어나는 분뇨를 일반 처리장(망원, 방배 등)이 다 처리하지 못해 서부 이촌동 곳곳에도 분뇨가 버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분뇨를 말려서 거름으로 팔며 그렇게 생계를 유지해갔죠.

■지금은 삶의 모습이 완전히 딴 판이 된 동부와 서부 이촌동

판자촌이 늘어서 빈민이웃이었던 동부와 서부이촌동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67년이었습니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한강변 개발계획’중 하나로 이촌동 앞 한강변을 모래로 메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67년 이촌1동에는 공유수면 매립공사 후 택지개발을, 68년 이촌2동에는 서울시공영주택 사업에 따라 중산, 시영, 시민 아파트가 건립됐습니다. 택지 개발을 한 이촌1동에는 학교, 기관 등이 들어섰고 대단지 아파트들이 함께 세워졌습니다. 반면 이촌2동에는 공영주택들과 일반 아파트들이 들어섰습니다. 이때 이촌1동이 지금의 동부이촌동, 이촌2동이 서부이촌동이 된 것인데요. 동부 이촌동에 살고 있었어도 돈이 없어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서부로 옮겨와 판자집을 지었습니다. 동부에 비해 지역이 좁다는 이유로 서부는 점차 개발 계획에서 밀려나며 결국 이때부터 동부와 서부는 큰 격차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동부 이촌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산층 아파트인 ‘한강 맨션아파트’가 들어서게 됩니다. 68년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4대 총재가 일본을 따라 ‘하이츠’와 ‘맨션’ 같은 고급 아파트를 한국에서 분양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맡은 주공은 장 총재의 구상에 따라 27평, 32평, 37평, 51평, 57평 등 주택형 24개동, 총 660가구 단지를 한강맨션에 조성합니다. 아파트 부지는 당시 동부이촌동 공무원 아파트보다 한강에서 더 가까운 곳을 골랐습니다. 당시 아파트 본 공사를 하기 전 견본주택을 건립한 것은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상 ‘한강맨션아파트’가 처음입니다.





특히 학교와 공공기관, 상가 등 각종 편의시설과 주거공간을 한 곳에 모아 놓는 ‘근린주구론’을 시도하며 주택 건설 역사에 한 이정표를 제시했죠. 1층에 아케이드 방식으로 배치된 상점들과 더불어 가로 축을 따라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설계했는데 지금도 동부이촌동을 가면 이 거리가 그대로 노후화된 채 남아있습니다. ‘맨션’이라는 고급 아파트 이름을 따 ‘맨션족’, 도둑이나 강도가 많이 든다고 해 ‘도둑촌’ 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죠.

당시 성공적인 분양과 함께 동부 이촌동은 유명 영화배우와 정치인, 기업인들이 한데 모여 살며 ‘부촌’을 형성해갔습니다. 한강맨션은 지나치게 호화로운 규격이라 국영기업체에서 사치를 조장한다는 사회적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여의도, 강남, 잠실로 중대형 아파트가 퍼지며 70년대 이후 아파트 대형화를 주도했죠. 당시 동부이촌동 길거리를 걸으면 유명 고위인사나 연예인 한두명은 꼭 만난다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한강 맨션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3,500만원으로 들어왔어요. 아들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해서 서울역에서 내려 근처에 학교가 있는 이곳으로 왔지요. 그때 이곳은 멋쟁이들이 정말 많이 살았어요. 앞집에 김종필도 살았습니다. 먹고 살만했던 사람들이 이미 왔던거죠.”

끊임없이 상권이 발달하며 동부 이촌동의 몸값은 계속 뛰었습니다. 강남 개발에 강북 개발이 다소 밀리기도 했지만 1990년대 추진된 재건축 때문에 강남 부럽지 않은 강변 부촌이 되었죠. 공장 부지를 헐고 개발한 자리에 들어선 GS한강자이가 대표적입니다. 2003년 4월 입주한 한강자이는 2003년 5·23대책 당시 일반거래시세가 17억9,000만원(76평형)이었는데 같은 해 9·5대책과 10·29대책을 거치면서도 19억원대로 꾸준히 올랐습니다. 현재는 같은 평수 28억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구 렉스아파트를 재건축한 56층 초고층 아파트인 ‘래미안 첼리투스’가 들어서며 다시 한 번 동부 이촌동의 가격 상승을 이끌었습니다. 이 외에도 한강맨션아파트, 왕궁아파트도 71년도 지어져 지금은 재건축을 앞두고 있습니다. 50년 정도된 낡은 아파트지만 개발을 앞두고 전용면적 87㎡에 23억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대장 아파트격인 이 단지가 개발되면 이촌동의 몸값은 한층 더 뛸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강 르네상스 개발 공약으로 무너진 서부…완전히 상권 붕괴

반면 서부이촌동은 단지별 소규모 재건축이 이뤄졌을 뿐, 대단지 지역개발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학교도 없는데다 지역이 좁고 용산 정비창 부지와 맞닿아 있어 주거지 선호도가 높지 않아서 인데요. 주요 건설사들도 사업성이 낮아 보이는 서부보다는 동부를 훨씬 더 선호했습니다.

답답한 세월을 이어가던 서부이촌동에도 2007년 8월 희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용산 철도정비창 개발 소식인데요. 오 전 시장은 ‘한강 르네상스’란 이름으로 용산 부지와 서부이촌동을 포함시켜 한꺼번에 개발 계획을 세우겠다 발표했습니다. 약 57만㎡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로 서부이촌동은 온 동네가 들썩였습니다. 랜드마크 건물은 지금의 제2롯데월드보다 높은 최대 620m로 세워질 계획이었죠. 집값이 한 주 사이에 억씩 올랐고, 집값과 땅값이 몇 배씩 뛰었습니다. 2억이었던 집이 자고 나면 억씩 올라 8억까지 팔렸다고 합니다. 주택가격이 한 때는 동부이촌동을 앞지르기도 했었죠. 이런 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2013년엔 주거지역 공시지가 상위 50위 이내에 서부이촌동 필지가 47개나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민관협동형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대규모 건설사들이 사업에 손을 떼며 사업이 점차 쪼그라들다 2013년 결국 이 계획은 백지화 되고 말았습니다. 주민들로서는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죠. ‘한강 르네상스’ 계획으로 서부 이촌동 지역이 재개발 지역으로 묶이며 건축제한을 받았던 터라 낡은 아파트도 개발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개발이 무산되니 서부이촌동은 침체기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산시영아파트입니다. 이 아파트는 1970년 준공되었고 96년 용산구로부터 재난 위험시설 D등급을 받으며 재건축의 논의가 시작됐지만 ‘국제업무지구’ 소식으로 사업이 무산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

방치된 노후 건축물에 높은 공시지가로 세금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하나둘 이사를 가고, 그나마 있던 상가, 식당, 택배 물류센터 등도 모두 이사를 갔습니다. 지금 서부이촌동에 가면 돌아다니는 사람조차 많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볕들 날을 기다리던 서부 이촌동. 20여년간 개발 공약과 무산이 반복되다보니 이번 용산정비창 개발 소식에도 무덤덤해 보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지금 12평짜리 단칸방이 10억이 넘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지금 정부가 개발한다고 하는데 우린 그 말 이제 안 믿어요. 정치 놀음 뿐인거지”라 대답했고, 서부 이촌동에 자리한 부동산 관계자는 “거래 자체가 없어요. 거래 허가제로 묶여서 사기도 힘들 뿐 아니라 또 재건축을 못하게 묶어놨는데 언제 용산정비창이 개발될지 모르는데 누가 이런 허름한데 돈을 넣고 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정부 지난 5월 용산 옆 철도정비창에 국제업무대신 이번엔 8,000호 이상의 미니 신도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쭉 놀아오던 땅을 개발하는 것 자체만으로 주변 개발에 속도가 날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고, 언제 진행될지 모르는 개발 공약을 두고 피해를 보는 것 결국 시민들이란 입장도 많은 상태입니다.





한강변 모래벌판 위에 홍수가 나면 집터가 쓸려 내려가는 가진 것 없던 동네에서 서울 부촌의 시그니처가 되기까지. 한국의 부동산 역사를 한아름 안고 있는 동부, 서부 이촌동 이야기. 어떠셨나요? 세월이 흘러 건물은 낡아도 변하지 않는 부티를 갖고 있는 동부 이촌동과 개발의 용틀임 속에서 꿋꿋이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서부 이촌동은 10년 뒤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요?

/정수현·이종호 기자, 차현진 인턴기자 value@sedaily.com

/정수현 valu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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